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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3년에 금융시장 더 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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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봄 국가위기 때 재무장관 지낸 이승윤 전 부총리, …“공적자금 너무 쉽게 내줬다”

“대통령이 법과 질서의 테두리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법·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결여돼 있는 것 그 자체가 위기예요. 법과 질서가 이렇게 문란해서야 위기관리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80년 봄 국가위기에 재무부 장관을 지낸 이승윤(69) 전 부총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내치(內治)에 관심을 돌리고 법과 질서의 기초를 닦는 대통령이 돼 달라”고 주문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서울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90.0%가 “한국경제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단적으로, 지금이 경제위기라고 봅니까?

“위기에 봉착한 건 사실입니다. 40년에 걸친 근대화 과정에서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별로 없지만 지금 당면한 위기는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고 봅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이렇게 심대(深大)했던 적이 별로 없어요. IMF체제하에 강요된 고금리 디플레 정책도 구조 문제를 심화시켰죠. 사실 외환위기는 우리 잘못도 있었지만 아시아 금융위기의 파급효과가 컸잖습니까? 이를 무시하고 美 재무부 로버트 루빈 장관, 로렌스 서머스 부(副) 장관 등이 우리나라를 포함해 개방에 대한 준비가 안 돼 있던 개도국들에 시장을 개방하도록 무리하게 압력을 넣어 문제가 생긴 겁니다. IMF가 이를 심화시켰구요. 구조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우리 문제는 뭔가요?

“대응 시스템 구축이 안 돼 있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구조조정의 종합적인 청사진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청사진이 없으니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구할 수가 없었구요. 지금도 구조조정의 주체가 누군지 불분명합니다. 표면적인 주체가 있긴 하지만 정책방향이 왔다갔다하고 있어요. 구조조정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전담할 기구를 만들었어야 합니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생겼잖습니까?

“재정경제부와 금감위간에 권한과 책임의 한계가 모호합니다. 이 때문에 구조조정이 지지부진 표류하고 있어요. 금융 구조조정만 해도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한다고 했다 반발이 심하니까 우량 은행까지 합병한다고 하고…,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지주회사를 만들 때 과연 구조조정에 메리트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 금융시장이 불안하니 예금자고 은행이고 모두 수익성보다 안정성 위주로 돈을 굴리고 그 결과 자금의 편재 현상이 심각한 실정입니다. 돈이 투신권에서 은행으로 그것도 주택·국민 등 안전한 은행으로만 몰리고, 은행들은 은행들대로 위험도가 높은 회사채 매입과 기업 대출은 기피하고 소비자 금융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저축률이 높아지고 있는 데도 자금이 편중되고 있다는 거죠. 구조조정 3년에 금융시장은, 안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안해졌습니다. 금융의 중개기능을 이 때 보완하지 않으면 내년에 상당한 기업 부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요. 다 구조조정의 주체가 불분명한 탓입니다. 부총리 자리를 없애고 권한을 분산시켰으니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요. 구조조정 총괄 기구는 대통령 직속이라야 합니다.”

─정부 주도의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습니다. 지주회사로 만든다고 없던 수익성이 생겨날까요?

“글로벌화 추세 속에서 금융기관들이 살아남으려면 경쟁력을 키우는 길밖엔 없습니다. 합병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중장기적 과제죠. 금융 구조조정은 금융기관의 정상화와 경쟁력 제고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는 겁니다. 지주회사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금융의 중개기능은 어떻게 살리죠?

“장기자금을 공급하는 기관이 실종됐습니다. 은행들은 기업 대출을 기피하고 투신사들은 더 이상 회사채를 인수할 능력이 없어요. 2∼3개 기업 빼고는 상환기한이 도래한 회사채를 재발행할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장기로 못하니 한 달 내지 3개월짜리 초단기 자금시장으로 몰릴 수밖에요. 중개기능의 왜곡이 정말 심각합니다. 이대로 가면 건전한 기업들도 속속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환도 못하고 재금융(리파이낸싱)도 못하면 도산이죠. 이래도 시장에만 맡길 겁니까? 정부가 보완을 해야죠. 정부가 나서 자금순환구조상의 문제를 시정해 줘야죠. 그런 점에서 프라이머리 CBO(발행시장 채권담보부증권)·CLO(대출채권 담보부증권) 등의 발행을 허용한 건 썩 잘한 일입니다.”

─결국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네요?

“비상의 시기입니다. 시장이 정상화될 때까진 정부가 하겠다고 하는 편이 나아요. 민간이 하는 것처럼 하면서 정부가 하는 게 더 문제죠. 책임은 안 지고 권한만 행사하겠다는 거니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전면에 나서야 합니다. 정부 주도형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누적된 구조문제의 해결은 정부가 책임지고 하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 주도인지 아닌지 불분명해요. 시장경제에 맡기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국민들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죠. 시장경제에만 맡기면 자금정책은 관심 밖인 외국인 지배하의 은행은 수익성 위주의 정책을 펼 걸요.”

─외국자본의 시장참여에 문제가 있다는 건가요?

“포철·한전 등 국가 기간산업과 시중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이 너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SK텔레콤 등 일부 우량 민간기업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한 나라의 주요 기간산업과 주요 은행들의 지분을 외국인이 50% 이상 소유한 예는 없습니다. 못 갖게 하자는 건 아니지만 우리로선 관심을 갖고 지켜 봐야죠. 외국계 자본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면 좋지만 우리나라 산업정책에 반하는 쪽으로 금융관행이 굳어지면 문제라는 거죠. 자본은 자유 이동하지만 노동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국경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후진국 자본시장 개방이 각국의 발전단계에 대한 고려 없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덕에 미국이 호황을 누린 겁니다.”

─시장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도 문제 아닌가요?

“자원 배분을 시장세력-민간이 결정한다는 의미에서의 시장이죠. 시장이 항상 옳은 건 아닙니다.”?

─시장 참여자 중 일부가 자신들의 입장을 시장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시장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죠.”

─국민·주택은행의 합병을 둘러싸고 노정(勞政) 갈등이 심각합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노동 개혁을 주시하고 있고, 노조의 반발로 구조조정이 번번이 지연되면 국가경쟁력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해법이 뭐라고 봅니까?

“노동시장의 유연성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는 1차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면 2차 시장이 없어요. 그러니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겁니다. ‘일방적 구조조정에 반대한다’는 통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고…. 2차 노동시장에 대한 준비에 정부가 착수해야 노동계도 협조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IT(정보기술)산업화 등에 대비한 훈련과 재교육을 꾸준히 실시하는 겁니다. 정부 자금으로 지원도 하고. 그래야 노사협조가 이뤄집니다. 구조조정을 못했을 때 치러야 하는 비용에 비하면 재교육 비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는 자금 순환구조의 문제와 더불어 지금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양대 과제예요.”

─나머지 개혁들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정부가 상당히 애를 썼지만 시스템 구축이 안 돼 효과를 못 보고 있습니다.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기업은 자꾸 부실화하고 다시 금융 부실화로 이어지는 부실화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어요.”

─무엇보다 기업 퇴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퇴출 판정이 나면 빨리 퇴출시키는 게 비용을 최소화하는 길입니다. 은행도 나쁜 은행은 합치려 들지 말고 퇴출시켜야 돼요. 유예시켜 봤자 투입하는 공적자금의 규모만 커질 뿐입니다.”

─공적자금 조성과 집행·관리는 어떻게 보나요?

“일본과 달리 공적자금을 너무 쉽게 내 줬습니다. 경험과 인력이 부족했겠죠. 그래도 엄격한 스탠더드를 만들었어야 합니다. 부총리제가 신설되면 금융감독원은 재경부 산하로 들어가야 돼요. 무엇보다 대통령이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합니다.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으면 누가 재경부 장관이나 금감위원장이 돼도 안 됩니다.”

─야당에서 대통령의 당적 이탈을 요구하고 있고, 연립내각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당이 있어야 대통령이 권위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야당서 몇 명 경제팀에 들어간다고 문제에 대한 인식과 처방이 달라지겠습니까? 대통령이 경제부총리에게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부여하고 자주 만나 힘을 실어 주는 게 낫지….?

·1931년 인천生 ·인천고,서울대영문과卒,
美미주리대 캔자스시티교대학원 경제학 석사
위스콘신대 매디슨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60~75년 연세대,서울대,서강대 교수
·71~76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79년 국회의원(9,10,13,14대)
·80년 재무부장관
·83년~88년 해외건설협회장·90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90년 금호그룹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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