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외교전쟁'은 한·일 모두에 손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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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일 간에 또다시 격랑이 일고 있다. 이번에는 독도 문제와 교과서 왜곡이 겹쳐 우리 국민 감정이 비등점(沸騰點)을 넘도록 끓어오르고 있다. 이참에 노무현 대통령의 초강경 담화까지 발표돼 사태 추이를 더욱 가늠하기 어렵게 됐다. 우리 국민은 일본에 대해서만은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과격한 감정 표출을 서슴지 않았는데 이번 담화로 더욱 격화될까 우려된다. 사실 과거 정권이 모두 일본에 대한 국민 감정을 이용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격앙된 감정만으로 계속 대응해야 할 것인지 한번쯤 숨을 고르고 곰곰이 득실을 따져 보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시마네현의 조례 제정이 현(縣)과 중앙 정부 간의 계산된 역할 분담이고 우리가 이에 말려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일본 정부로서는 시마네현의 조치가 일개 현의 행위인 만큼 관여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한 그것이 정부의 대외적 입장 천명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피해 갈 수 있는 도피로(逃避路)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치가 한국민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계산했을 개연성도 있다. 실제로 세계 언론은 시마네현의 움직임 그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가 한국 내 곳곳에서 일장기 태우기, 일본 지도자 화형, 단지(斷指), 분신 기도 등 항의 규탄 시위가 과격해지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한.일 간 영토분쟁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크게 부각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돕고 있는 셈이 되었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거국적인 과격시위를 보고 혹시 "한국이 무언가 꿀리는 데가 있나"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일개 현 의회의 조치에 대해 대통령까지 이를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행위"로 확대하고, 국회 차원에서 규탄 결의와 특위 구성까지 하며 정치권이 총동원되는 것이 국제 사회에 어떻게 비쳐질지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시마네현은 일본의 47개 현 단위 지자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한 현의 조례 제정은 원래가 역사적.법적.지리적으로 우리 고유 영토이고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 지위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인 만큼 우리는 좀 더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일본인 모두가 역사 왜곡에 동조하고 영토 야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극도로 흥분된 감정 표출은 역사와 영토 문제에 균형 잡힌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대다수 일본인마저 혐한감(嫌韓感)을 갖게 하지 않으리라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한국 문화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많은 일본인, 한류에 도취돼 새로이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한국을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많은 일본인마저 등을 돌리게 해서는 안된다.

마산 시의회가 우리 입장을 오히려 약화시킬 수 있는 '대마도의 날'을 선포하고 여러 지자체가 쌍방 주민 간의 이해와 교류 증진을 도모하는 자매결연을 취소하는 것 또한 현명한 처사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 학생이나 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방한 기회를 주어 한국을 잘 이해시키는 것이 앞으로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냉정을 잃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할 것"을 당부하면서 그 자신은 일본에 대해 "외교 전쟁"을 선포했다. 최고지도자의 최강의 요구와 표현은 스스로의 퇴로를 막아버리는 것이며, 이러한 '외교 전쟁'은 승패를 떠나 양측 모두에 큰 손실만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 국민 모두가 보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논리적 접근을 적극화하는 것이 일본 내에서나 국제적으로 우리 입장에 대한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고 본다.

최동진 인제대 석좌교수.전 외교부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