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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소설가 유미리씨 작품 두권 출간

중앙일보

입력

평생 직장이란 말이 없어지고 있듯 가족도 붕괴되고 있다. 숙명적으로 여겨지던 가족간의 관계가 이제 간단한 이유 하나로 말끔히 지워지고 있다.

별거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청소년기가 한이 되어 끈질기게 가족을 주제로 한 소설로 일본문단에 우뚝 선 재일교포 소설가 유미리(柳美里 ·32)씨의 작품집 2권이 사람 사는 정이 그리운 연말을 맞아 잇달아 번역 출간됐다.

민음사에서 펴낸 '가족 스케치'(김난주옮김 ·8천원)는 유씨가 2년간 '주간 아사히'에 연재한 가족에 대한 콩트 같은 산문 65편을 모아놓은 것.

결혼 ·이혼 ·재혼 ·별거 ·불륜의 한가운데 있는 가족,경제적인 문제 ·노인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가족, 일 중독자 ·애처가 ·구두쇠가 있는 가족, 의사소통 단절과 소외로 앓고 있는 가족 등 지금 붕괴되고 있는 가족상을 스케치하듯 그려놓고 있다. 그러면서 유씨는 부모의 별거로 뿔뿔이 흩어져살고 있는 자신의 가족을 둘러보고는 "그렇게 한심한 편은 아니지 뭐"라며 자조하고 있다.

그리고 "행복한 가족은 비슷비슷 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천차만별이다"라는 말과 같이 한발짝 떨어져 불행한 가정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게하면서 결국 뗄래야 뗄수 없는 가족간의 관계와 사랑을 되새기게 한다.

문학사상사에서 펴낸 '생명'(김유곤옮김·7천원)은 일본에서 지난 6월 출간돼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캔들'이라며 지금까지 50만부나 읽히며 독자들을 울리고 있는 장편소설.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유부남의 아이를, 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생명 의지 하나로 출산하는 미혼모의 이야기를 다룬 유씨의 자전적 소설이다.

"지금 내 손가락 사이에서 시간의 모래가 새나가고 있다.물과 하늘과 수목 같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아니고, 불꽃놀이나 여름 해변 관광등을 즐기면서 호사스럽게 지내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일상 생활 속의 1초 1초가 내 머릿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되돌려 놓을 수 없는, 거꾸로 뒤집어 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모래시계,모래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을 때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시현상일까? 나는 그 한알 한알에 눈길을 주며, 한알 한알이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부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하는 것을 바라보는 작중 주인공, 즉 유씨의 심경을 드러낸 마지막 부분이다.

처녀와 유부남과의 내밀한 불륜을 마치 일기 쓰듯 적나라하게 공개한 점, 또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향한 헌신적 사랑과 그 사랑을 잇기 위한 출산 등 통속적 부분이 문제 될 수도 있으나 이 작품은 사랑과 생명에 대한 치열한 내면고백 소설로 읽힌다.

특히 모래시계 같이 한알 한알 빠져나가는 우리의 삶에서 영원 같은 것은 추구하지 않고 매 순간순간을 영원 처럼 살아내려는 신세대적 세계관의 한 정점도 드러난다. 유씨는 이러한 가치관으로 '생명'표지에 아들을 안고 있는 사진마저도 과감하게, 상업적으로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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