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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번 기생들의 민요·풍류 보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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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나날이 활발해지고 있다.

과거에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던 분야에까지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성공한 여성의 상징이었던 '여류'라는 칭호도 사라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성 음악가의 활약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고 공연 양상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시대 여성 예술인의 대표격은 왕실 소속의 의녀(醫女) 또는 침선비였다. 이들은 왕실 전용의 가무만 담당했기에 그 공연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궐밖의 지방 관아에 소속된 기녀(妓女)들은 지방의 공사연에서 가무 활동을 하는 한편, 서울로 선상(選上)돼 왕실의 연회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관기(官妓)들은 악사(樂士)나 악공(樂工)에 비해 지위가 낮았지만 양민 출신으로 일종의 하급 공무원 신분이었다. 이들의 출신이나 연행 종목은 일제 강점기 때 권번 출신의 기생과 달랐다.

한동안 국악이 곧 기생음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은 권번 출신 기생들의 공연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재색을 겸비할수록 인기가 높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소리가 장기인 경우에는 인기의 수명도 길었다. 다소 음악적 기량이 떨어져도 미모로 득세한 기생들도 있었는데, 서도지역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활동하던 기생들은 1920년대 말부터 권번제도를 통해 조직화했으며, 이로써 음악을 사고 팔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생들은 원칙적으로 매춘을 업으로 하는 공창(公娼)제도 하의 매춘부와 성격이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간혹 밀매음을 하던 기생들로 인해 불분명해지기도 했으나, 일제하 권번에서 기예를 교육받은 기생은 대부분 선비의 풍류·판소리·산조·민요 등은 물론 왕실의 음악을 일반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여성 음악가들이 공개 무대에서 공연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년대부터다.

판소리 초창기 시절 명창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산조의 경우도 창시자 김창조를 비롯해 김병호·최옥삼·신쾌동·한갑득 등 대다수의 명인이 남성이었다.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은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서 홍일점으로 참가해 좌중을 놀라게 한 후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30년께 박녹주·이화중선·김초향 등 여류 명창이 배출되면서 판소리 분야에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여성 음악가의 본격적인 예술활동은 이 무렵에 시작됐다. 여성 음악가가 음악을 선택하게 된 것이 이전까지는 생계 유지를 위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예술활동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국악에서 여성 음악가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 그 배경에는 20세기 전반에 활약한 기생들의 예술활동 공헌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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