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실세 검은돈’ 수사, 미적거리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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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는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지난 24일 대구 선거사무실의 자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대검 중수부의 압수수색이 실시되기 하루 전으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2010년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 때처럼 ‘몸통’을 감추기 위한 증거인멸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현 정부의 실세로 ‘왕차관’으로 불려온 박 전 차장은 소환조사를 앞두고 있다. 검찰은 이정배 전 파이시티 대표로부터 “2007년 DY랜드건설 이동율 대표를 통해 박 전 차장에게 10억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상태다. 특히 박 전 차장은 이번 사건과 대선자금 의혹의 관련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고리인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런 박 전 차장의 선거사무실에 있던 자료들이 통째로 옮겨졌다는 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 아니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나갔다가 사무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한 뒤 짐이 옮겨진 장소를 찾아내 필요한 자료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자료가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박 전 차장은 압수수색 후 지방행 버스에 올랐다고 한다. 주초부터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 전 차장이 검은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보도돼 왔던 터였다. 박 전 차장으로선 자신의 행적이 담긴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수수사의 생명은 치밀함과 전격성이다. 관련자끼리 입을 맞추거나 증거를 빼돌릴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금품을 주고받은 사람 외에는 내막을 알기 힘든 알선수재나 정치자금 사건은 신속하게 수사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크다. 설령 일부의 추측대로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번 압수수색은 한 박자 늦은 감이 있다. 최 전 위원장의 경우 압수수색을 실시하지 않았다. “본인이 시인해 사실상 증거를 확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란 검찰 설명은 석연치가 않다.

 파이시티 사건은 대검 중수부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 이후 처음으로 벌이는 권력형 비리 수사다. ‘MB(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 전 위원장과 박 전 차장에 이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 연루설까지 불거지고 있다. 최 전 위원장이 2010년 파이시티 횡령사건 수사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권재진 법무부 장관에게 부탁 전화를 걸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조사 과정에서의 작은 미적거림이 수사 전체를 어그러뜨릴 수 있는 상황이다. 세간에는 최 전 위원장 등을 사법처리하는 선에서 의혹 확산을 막을 것이란 의구심이 남아 있다. 실제로 대충 사건을 덮었다가 두고두고 문제가 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검찰은 그토록 고대하던 국민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전기를 맞고 있다. 중수부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오는 대로 수사하겠다”는 다짐이 신뢰를 얻으려면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