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떠나라" 백인 학원강사 미행해 집 앞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한국에서 활동 중인 원어민 영어 강사들의 모임 대표를 맡았던 미국인 A씨는 ‘KEK(Kill White in Korea)’라는 단체로부터 받았던 충격적인 e-메일을 잊지 못한다. 여기엔 “외국인들을 한 명씩 처단하겠다. 소란 피우지 말고 한국을 떠나라”는 협박 내용이 들어 있었다.

 A씨처럼 한국인들로부터 인종 차별적인 모욕을 당한 외국인이 늘고 있다. 그동안 아프리카나 동남아 지역의 일부 가난한 나라 출신들에게만 집중됐던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 현상이 국적을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예부터 다른 민족에 관대했으며 오히려 일제시대 학살 등 제노포비아의 광풍에 희생됐던 역사적 사례를 들어 외국인 혐오증을 서둘러 차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백인은 마약 우범자?=최근 고개를 든 서양인들에 대한 혐오 현상은 각종 외국인 범죄에서 비롯됐다. 주한 미군 등이 저지른 범죄가 잇따라 보도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 것이다.

 지난해 9월 주한 미군 소속 병사가 서울 마포 고시텔에서 여고생을 성폭행하는가 하면 지난달에는 서울의 한 사립대학 기숙사에서 러시아인 등 외국인 유학생 3명이 마약을 흡입하다 경찰에 입건된 게 전형적인 사례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망 온 외국인 학원 강사가 적발되자 학부모를 중심으로 이 강사의 신분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불법 외국인 강사’를 퇴치하겠다며 만들어진 한 인터넷 카페에는 1만 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했다.

 얼마 전 이 카페에는 '영웅이 떠났다'는 아쉬움의 글이 올라왔다. 경찰과 공조하면서 수많은 불법 원어민 강사를 찾아내 추방시킨 카페 주역의 활동이 뜸해지자 한 회원이 아쉬움을 표한 글이다.

이 카페의 행동대원들은 전국 학원의 외국인 강사에 대한 정보와 제보를 수집하면서 여러 명의 무자격 강사를 찾아내 경찰에 입건시켰다.

 문제는 이런 활동이 지나치면 무분별한 제노포비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남아 노동자만 싫어하지 말자”는 한 인터넷 글은 언뜻 보기엔 이주민 노동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영어 좀 한다고 각종 혜택과 함께 쉽게 돈 버는 서양인들을 더 미워해야 한다”는 취지다. 한 네티즌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들은 자기 나라에서 범죄자였거나 저질 하류 뜨내기들이었다”고 폄하했다.

 이에 대해 외국인 강사들은 일부 한국인들이 강사를 미행하고 집 근처에 잠복하는 등 범죄 혐의를 잡아내겠다며 사생활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한국 정보에 밝아 국내 체류 외국인들 사이에 ‘파워 블로거’로 불리는 로버트 쾰러는 “경찰도 아닌 개인들이 조직을 꾸려 남의 집 앞에서 잠복하고 추적하는 것은 불법 스토킹”이라고 비판했다. 서울 강남의 한 어학원 강사인 마크로(24)는 “왜 그런 사람들은 외국인만 추적하느냐”며 “외국인만 감시하는 건 인종차별적인 행동”이라고 말했다.

이자스민씨는 지난 4·11총선에서 이주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새누리당 비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후 ‘(고국인) 필리핀으로 가라’ 등 인종차별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씨는 “숨을 쉬어야죠. 뭐, 어떻게 하겠어요”라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다른 다문화가정 구성원들이 받았을 상처를 못내 걱정스러워 했다. [연합뉴스]

◆국회의원까지 나왔는데=다문화 가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남아 출신들에 대한 차별은 이제 얘기를 꺼내기가 새삼스러울 정도다. 최근엔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35)씨에 대한 공격으로 또 한번 논란이 일었다.

 지난달 초 비례대표 후보로 거명되자 이씨가 근무하는 서울시청에는 “네가 뭔데 국회의원을 하려고 하느냐. 너희 나라로 가라”는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선 후에는 “이제 불법체류자가 판을 치게 됐다”는 등의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오히려 이씨는 지난 17일 “이번 일로 상처도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포용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에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해 대부분의 상식 있는 한국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증오는 건설현장과 서비스 업소 등에서 일자리를 대거 빼앗기는 데 따른 분노의 표출이다. 건설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해온 박정식(45)씨는 “지금은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인을 부리는 형국”이라고 씁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자스민씨의 국회의원 당선을 두고 한 이주노동자 반대 단체 간부는 “이씨의 당선은 독초를 자라나게 하는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저급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민족의 피를 흐리고 있다.” “최하층의 이민 노동자를 들여와 우리나라 사람들과 결혼시키는 것은 민족 말살 행위다.”

 일부 외국인 혐오 사이트나 인터넷 카페는 이처럼 비뚤어진 ‘순혈주의’에서 나온 증오감 섞인 글들로 도배된다.

◆중국동포에게도 모욕 쏟아져=국적은 달라도 외모와 언어가 같아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대우를 받았던 중국동포들도 최근엔 각종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오원춘씨 사건에 이어 직업소개소장을 무참히 살해한 영등포 살인 사건까지 중국동포의 강력 범죄가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다.

 심지어 인터넷엔 "조선족(중국동포)은 인육을 먹는다” "조선족은 뼛속까지 더러운 중국인이다”는 등의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근거 없는 모욕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중국동포들의 생활 습관이 다르고 한국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다 보니 시비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중국동포들이 많은 서울 대림동에 사는 서모씨는 “중국동포들은 가다가 조금만 부딪혀도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동포들은 대다수의 선량한 사람까지 매도하는 일부 한국인들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온 일용직 노동자 권모씨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하찮게 보는 경우가 많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산둥성 출신의 서모씨는 “다 똑같은 동포인데도 유독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업신여긴다”고 했다.

 김해성 지구촌사랑나눔 대표는 “이주민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향적 국제화에 더 신경을 쓰는 한편 ‘불법’체류자라는 말도 ‘미등록’ 혹은 ‘초과’체류자 등의 용어로 순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중앙일보 칼럼에서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의 재일 한국인 학살을 상기하며 “우리처럼 차별에 시달렸던 아픈 역사를 가진 민족에게는 (제노포비아 공격이) 반역사적인 자기 부정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이 세계로 약진하는 오늘날 폐쇄적 단일민족의 신화는 건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충고했다.

 한편으론 한국 사회에 더 빨리 융화하기 위한 외국인의 노력도 필요한 시기가 됐다는 진단도 나온다.

 송재룡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국인들이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범죄 예방 활동을 하는 등 한국 사회에서 이미지를 높여가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홍민지 서울시 글로벌센터 팀장은 “다문화 가정들도 이제는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인을 위한 활동에도 참가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강신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