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는 없어져야 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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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춥지 않은 수능고사 시험이 있었습니다. 18년 전 제가 시험을 보던 날도 그다지 춥지 않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이제 해방의 자유를 만끽할 수험생들이 대책 없이 부럽기도 합니다. 시험이 끝난 날 밤이 새도록 길거리를 걸어다니며 소리지르고 놀던 제 청춘의 저 아름다운 시간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올해 입시생들은 아직 논술고사를 더 치러야 하고, 또 그 전에 지원을 위해 극심한 눈치 작전을 펴야 할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도대체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을 대학입시에서 눈치작전을 펴게 만드는 나라가 여기 말고 또 있겠습니까?

대학은 미래에 이 사회를 이끌어나갈 구성원들을 성숙으로 이끄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첫경험부터 성숙과는 거리가 먼 난장판을 거쳐야 하죠. 사행심에 가까울 그 소란의 심리학은 인생의 승부근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신 에너지의 낭비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은 책상머리에 앉아 자신의 권위를 휘두르는 일에 맛들인 교육부의 관료주의.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놓지 않기 위해 해마다 교육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무슨 일인가를 벌입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그저 실험대상에 불과할 뿐이죠.

다음으로는 우리 대학들 자체의 신뢰하기 어려운 부실. 사실 대학 당국의 불투명한 경영이 관료들의 개입 여지를 남긴 것이기도 하지요. 관리들의 권위주의가 대학의 부실을 어느 정도 눈감아주기도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점에서 교육부 관리들과 우리의 대학은 마치 우리 정치사의 양김(兩金)처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학벌과 명분을 중시하는 우리의 문화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소수일 뿐이죠. 아직도 학력과 학교에 대한 차별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학력이 낮거나 출신 학교가 좋지 않으면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들어 헐뜯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그 정점에 '서울대'라는 상징이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경성제국대학에서부터 시작해서, 해방 후에 이 땅에 들어온 미국 군정당국의 '국립 서울대'로 이어지는 그리 자랑할만한 것이 못되는 전통의 이 대학은 관료제의 정점을 차지하면서 한번도 스스로를 반성해본 적이 없습니다. 권위적 관료주의 체제의 최대의 수혜자가 바로 서울대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학 출신들이 바로 그 관료제의 주인공들이거든요.

그리고 독점의 오만함은 있으되 헌신의 겸손함은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대학문화가 다른 곳에까지 나쁜 선례로 퍼져 있습니다. 개인의 출세를 위한 최소한의 기능인들은 낳았으되, 봉사와 희생의 자세로 사회와 개인이라는 전체를 통찰할 엘리트 지식인은 길러내지 못한, 탈이 난 지성의 전당인 것이죠. 오늘날 우리 경제를 이토록 휘청거리게 만든 천민자본주의와 그것의 썩은 윤리학을 만든 주요 뼈대가 우리 현대사의 정치군인들과 함께 독점적 지위의 서울대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다 또 고된 경쟁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안주한 과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다른 대학에 비해 월등히 많은 예산의 혜택을 입고 있다면 마땅히 그것을 함께 나누는 지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다른 대학들과 도서관이나 박물관의 자료를 공유한다든가, 연쇄적 이동에 따른 편입의 부작용이 걱정된다면, 학점 교환이나 교환교수 제도를 통해 다른 학교의 구성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어야 합니다. 대학원에 쿼터제를 두어 타교 출신의 능력 있고 성실한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어야 하구요.

서울대의 과오를 지적하자면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무엇보다도 배타적으로 자신들의 순수 혈통을 주장하느라 소통의 역동적 에너지를 잃은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결과는 비효율적인 공룡의 탄생입니다. 그리하여 껍데기만 남은 상징으로서의 서울대는 이제 우리 현대사의 걸림돌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대판 신분제 사회의 정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지요. 실제적인 능력은 없고 헛된 위세만 남은 정점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땅의 거의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아직도 이 서울대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여전히 가치의 서열과 권위주의에서 벗어날 가망이 없어 보이구요. 서울대 폐교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맥락은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바로 앞의 글에서 언급한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에서도 그러하고,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에서도 이 점은 여지없이 논파되고 있더군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서울대학교 졸업생입니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과 자부심은 지금도 알게 모르게 제가 살아나가는 커다란 밑바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되돌아보면 과연 제가 그러한 자부심에 걸맞은 교육을 받고 나왔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우쭐대다 세상에 나와 어리둥절한 경험이 있거든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몇몇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가르침은 물론 값진 것이고 지금도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서울대는 없어져야 하는가?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전제조건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한국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놓아둔 채 과연 서울대를 없애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입신출세만을 지향하는 교육을 둘러싼 우리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현재의 서울대가 없어지더라도 제2, 제3의 서울대가 다시 출현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대학의 경쟁력과 그것을 위해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지, 어느 특정 대학을 없애고 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변한 지하자원도 없고 합리적 경영이나 투명한 금융 등의 그 동안 쌓아 놓은 지식 정보도 많지 않은 우리에게 인적자원은 거의 유일한 국가재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키워내는 일은 그러니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초미의 과제인 것입니다. 어떻게든 우수한 인재들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교육제도를 만들어주는 일은 이 시대의 회피할 수 없는 의무이죠.

그러니 폐교를 주장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대안을 찾는 일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서울대를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대학으로 나눠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공계야 포항공대나 한국과학기술대학 같은 경쟁 상대가 있으니, 우선 문과 계열의 대학만이라도 강북과 강남으로 나눠 경쟁을 시키고, 그 결과에 따라 예산 배정이라든가, 교원 확충에 있어 현격한 차등지원을 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사립대학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고된 경쟁의 길에 당당히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술대학은 실기와 학문을 분리하여 실기는 과감하게 대학 바깥에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줘야 하겠죠.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모든 대학의 분화와 특성화를 유도하여 어느 대학도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경쟁이 없는 곳에는 마치 그림자처럼 부패와 비효율이 따라올 테니까요. 공평무사의 투명함이 보장된 교육제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대학의 경쟁력과 교육의 질적 효율성을 높일 수만 있다면, 지금 존재하는 서울대학교야 그 존재가 사라진다고 한들 무슨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변화가 닥치더라도 미래의 엘리트들로 하여금 자부심과 함께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일에는 인색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수한 인적자원이라는 우리의 유일한 자산이자 무기를 함부로 하는 일은 억눌린 감정 발산의 통쾌함은 있겠으되 현명한 자세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서울대 폐교론 논의에서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어쨌거나 수능시험을 끝낸 모든 수험생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박철화(steelyflower@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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