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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지 새천년]남북한 관계의 변화와 동아시아

중앙일보

입력

지난 2년여의 남북한 관계의 기본구도를 이해하는 데 게슈탈트 反轉圖가 큰 도움이 된다. 1998년 4월 이래의 남북한 관계는 한국의 햇볕·포용정책과 이에 대응한 김정일의 민족대단결 5대 원칙에 집약된 통일전선전술의 2항 대립이다. 남북한의 내심이 서로 다른데 그 동안 관계 진전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토끼와 오리의 게슈탈트 반전도에 나타난 상호착각의 구조 때문일 수도 있다.

[게슈탈트 반전도에서 본 남북한 관계]

오른쪽 하단의 게슈탈트 반전도는 좌측에서 보면 토끼이고 우측에서는 오리로 보인다. 한국 신정부가 햇볕정책을 토끼로 제시했다고 한다면, 김정일의 대남정책은 오리로 대응했다. 한국은 북이 토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했으나 북은 오리라고 고집하고 있으니 하나의 “착각의 합의”이다. 포용정책의 목표는 북이 오리라 고집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토끼임을 인정하리라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토끼가 아니고 오리라고 고집하며 당 창건55주년기념식에 우리 정당·사회단체를 초청하기까지 1948년 4월의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설회의에 나타났던 북한 주도의 통일전선전술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북한은 6월 이후 남한땅에까지 오리동조자가 생기게 하는 역전극까지 시도하고 있다. 실로 6월의 남북 악수는 동상이몽격이다.

게슈탈트 반전도에 비추어 볼 때, 6월의 6·15선언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북한은 이른바 조국통일합의의 “통일선언”으로 오리 고집을 계속하고 한국은 평화공존, 전쟁억제, 남북경제협력의 “평화공존선언”으로 역시 토끼임을 역설하고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것을 가지고 한쪽은 귀걸이, 다른 쪽은 코걸이라 하는 착각의 평행선에서는 기본 구도의 변화가 없다. 북한이 변한 것이 있다는 것은 착각이고 근본에서 변한 것은 없다. 6월 이후 북한 지도자는 남한에 친북여론을 일으켜 보려는 시네마형 심리전 전술을 시도하고 있다.

[남북한 관계 변화와 6·15선언]

새천년 6월을 기해 남북한 관계에 극적 변화가 일어났다.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대북포용정책이 제1단계의 큰 성과를 거두어 20세기 말까지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냉전구도가 해체되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온 세계에서 사회주의권이 해체된 1980년대 말로부터 북한은 붕괴위기에 직면하여 핵·미사일 등의 대량 살상무기를 담보로 주로 미국과 일본, 한국을 겨냥한 벼랑 끝 외교의 군사모험주의로 그 연명책을 구사해왔다.

북한체제의 본질은 이미 그 실패가 드러난 스탈린형 사회주의체제로서 중앙계획·중앙명령의 命令경제command economy가 그 특징인데 이는 바로 시장제도 없는 무시장 사회주의 경제였다. 舊사회주의권이 1990년을 기해 모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넘어오고 법의 지배, 인권, 자유언론의 자유민주사회가 되고 동아시아에서 중국·베트남도 시장사회주의market socialism가 되었다. 북한체제는 시장경제의 개혁개방을 회피하기 위해 수령주의 개인숭배의 독재를 권력세습으로 강화하고, 보다 철저한 병영국가garrison state형이 되어 선군영도의 군사독재형이 되었다.

1998년의 국방위원장 체제는 김정일의 일인전횡의 통치술에 기본하고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챙긴다는 점에서 “짐(朕)
이 곧 국가이다”라는 봉건적 절대왕정 모델이다. 원래 스탈린주의는 일인통치자 전제만능의 전면적 조작가능성의 체계인데 그 모델은 서커스단이다. 지난 남한언론사 대표와의 대화록에서는 북한지도자의 다음과 같은 언설이 주목을 끈다.

통일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내 힘은 군력(軍力)
에서 나온다.

이 언설에서 북한의 일인통치술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표현은 “우리 공화국의 원동력은”이라야 했는데 그에게는 그런 자유민주적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다. 바로 이 점이 오히려 북한과의 외교적 합의에서 협상상대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편리한 이점이 있다. 우리 한국과 같이 여야 및 각계각층 등에 걸친 광범한 민주적 합의절차가 북에서는 완전히 생략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6·15남북공동선언은 전쟁회피의 평화공존의 길을 열고 북한을 국제사회의 광명세계로 인도하여 불량국가rogue state의 오명을 벗게 해주고 이미지 개선에 눈뜨게 만든 것이다.

북한이 계속 군사주의 모험만 고집하면 동아시아에서 군사력경쟁, 군비증강만 부채질하여 이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격화될 수 있다. 바로 김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은 동아시아의 평화건설을 위한 실마리를 푸는데 주도권을 행사한 것이 되고 이것이 지난 2년 반의 대북정책의 큰 수확이다. 한국의 포용정책은 통일정책이 아니다. 그러나 포용정책의 기본목표인 군사적 신뢰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점에서는 아직 불안한 수확일 뿐이다.

[법적(de jure)
통일과는 다른 실질적(de facto)
통일상황의 인식]

김대중 대통령이 일관성 있게 추진한 대북포용정책은 2년 반의 그 전반기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시킨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은 남북한 평화공존의 기틀을 만들고 55년만에 세계지도에서 마지막 남은 냉전구도의 해체에도 진전을 일구어냈다. 역사적 통찰력의 구안자는 외교적 형용사에 현혹되지 말고 실로 지난 6월에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는가의 실체파악에 힘써야 한다.

지난 6월 15일에 평양에서 생긴 역사적 진전은 남북한 정상이 55년간의 냉전적 반목을 허물고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를 시인한 것이다. 1972년의 7·4공동성명은 성명 합의주체의 국호도 없고, 최고 정상도 아닌 양측대표가 각기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고 해서 이 성명은 상호간의 존재시인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6·15남북공동선언은 각기 자기 국호를 명시하고 남북정상이 직접 서명한 문서인 점에서 서로가 준외교적인 상대로 시인하였다. 이로써 냉전이데올로기의 유산인 남한의 “미수복지역” 개념과 북한의 소위 “공화국 남반부” 개념을 서로 없앤 것이 된다. 냉전종식은 그 첫 단계가 서로 상대방의 존립을 인정하는 작업이고 말하자면 “두 개의 체제 실체”가 공식적으로 남북한 상호간에도 시인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통일문제는 남북한이 서로 다른 통일 이데올로기를 가진 이념 대결이었다. 이 냉전형의 극복을 위해서는 평화공존의 제도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원래 공존이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전제 위에서 평화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2년 반 동안의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거둔 성과는 무엇인가. 우선 이 6·15선언으로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는 돌파구가 마련된 것이다. 우리의 포용정책은 그 기본 알맹이가 다시는 동족상잔이나 민족공멸의 비극을 만들지 않겠다는 전쟁억지정책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의 포용정책은 튼튼한 안보에 바탕을 두고 전쟁방지, 평화수호의 민족안보를 표방한다.

근래 우리 사회 일각이나 북한의 선전선동에서 6·15선언을 조급한 완전통일이라도 되는 듯이 언표하는 것은 그 선언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통찰하지 못한 냉전형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분단 후 남북한 동포가 서로 얼싸안고 하나가 된다는 감상적 통일이 얼마나 천진난만한 감정이었는가를 특히 동서독 통일에서 보았고, 예멘이 통일헌법을 만들어 이룩한 협상통일이 수개월만에 깨지고 남부 공산 예멘의 내전도발에 직면하여 북부 예멘의 시장경제체제가 남부 예멘의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무력통일이 된 역사적 사실을 보았다.

베트남을 포함하여 전후 분단 국가들은 모두 시장제로 통일되고 사회주의제도는 북한에만 남아있다. 김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은 독일식 흡수통일 등의 완전통일이 아니라, 20년∼30년간에 걸친 통일적 상황의 평화공존을 기조로 한 “두 개의 코리아”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통일 개념을 보다 섬세하게 구분한다면 법적de jure인 일민족 일국가형 통일과 구별되는 사실상de facto의 통일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통일적 상황에서는 전쟁회피의 평화노력을 기초로 하여 북한 경제의 자조자립을 돕고, 남북한의 우편교환과 자유왕래 등으로 실질적인 남북한의 민족적 불편을 제거하고, 두 가지 정치체제하에서도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통일 시장의 조성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남북간 우편교환도 못하면서 통일을 앞세우는 허위는 끝내야 한다. 6·15선언의 성과는 그 포용정책의 중핵인 군사적 긴장완화와 상호간의 군사적 투명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선행될 때만 그 열매를 거둔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6·15선언은 현 휴전상태를 평화공존의 군사적 신뢰관계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 큰 진전이다. 이는 북한의 북-미 2자구도 평화협정 시도가 시정되어 한국과 북한이 두 주역이 되어 평화의 군사적 신뢰를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제자리를 잡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기본 입장이다.

지난 2년간의 대북포용정책이 거둔 또 하나의 성과는 북한지도자를 이른바 은둔자에서 국제적 광명세계로 이끌어낸 것이다. 북한은 미·일 등 국제외교에서 생겼던 과거의 어두운 인상을 일신할 수 있게 되었고, 막대한 정보를 써서도 알 수 없었던 그 지도자에 대한 투명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 체제유지의 근간이던 非常時 정치도 끝나게 되었다. 과연 전시·준전시의 50년 “비상시” 통치를 그만 두고도 권력유지가 될 수 있을까?

특히 1980년대 이래 북한은 대외정책에서 불투명성을 그 자산으로 삼아왔다. 밖에서 보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그것은 외교적인 불로소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6월 이후 북한이 일단 불투명성을 가진 벼랑 끝 외교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은 북한이나 한국, 국제사회 모두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적 신뢰성에서까지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남북간의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개성공단의 경제협력 등이 모두 상호간의 군사적 신뢰구축이 선행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진전이 힘들다는 점을 북한도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美공화당 일각의 對북한관처럼 페레뜨이슈카인 것도 아니다. 러시아어의 페레뜨이슈카Peredyshka는 권투선수가 잠깐 숨돌리기를 하고 다시 대항해오는 숨고르기이다. 그러나 최근의 북한은 대남 심리전 단계로 넘어가 우리 사회 내의 국론분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지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화와 정책이 결합되면 대개 구호생산에 힘쓰는데, 북한은 지난 8월 1일 180개의 구호를 생산해서(98년 223개 구호제시)
노동신문 두 면에 게재했다. 이런 것이 시네마·폴리티카이다. 그런 심리전의 오지랖을 넓히려 하는 조짐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여 우리 자유민주사회의 개방성이 시네마 심리전에 발판을 제공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투명성 보장도 상호주의적 원칙에 철저해야 한다. 레닌의 “정치적 지도 기술”(북한은 이를 “영도예술”로 미화)
의 제1조가 대중 동원의 구호 만들기이다. 김정일의 통치술은 레닌주의의 구호에 의한 대중 선동의 구닥다리 수법만 되풀이하고 있다(신일철 /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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