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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긴축 강요하더니 유럽엔 긴축 속도 늦춰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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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58) 총리, 볼프강 쇼이블레(70) 재무장관, 옌스 바이트만(44) 분데스방크 총재. ‘베를린 트리오’로 불린다. 이들은 요즘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엔 저승사자로 비친다. 외환위기 때 한국인의 눈에 비친 미국 정책 결정자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실제 베를린 트리오는 유럽 재정위기 대책을 주도하고 있다. 이른바 ‘베를린 컨센서스(Berlin Consensus)’를 바탕으로 해서다. 그 핵심은 ‘위기 원인은 지나친 빚 때문이고 재정긴축만이 해결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유럽개혁센터(CER)의 수석연구원인 필립 와이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베를린 컨센서스는 1990년대 워싱턴 컨센서스의 유럽 버전”이라고 설명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미국 중앙은행·재무부,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태국 등에 구제금융을 해준 대가로 요구한 긴축 처방의 밑바탕이었다.

 바로 그 IMF가 17일(현재시간) 베를린 컨센서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IMF는 이날 발표한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정부 지출을 지나치게 줄이면 경제가 침체에 빠져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정 긴축 고삐를 잠시나마 늦추고 경제성장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IMF가 베를린 컨센서스 핵심인 긴축을 중단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 회장,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만이 베를린 컨센서스를 비판했다. 이른바 ‘비판적인 소수’로 불리는 전문가들이다. IMF는 비판적 소수의 손을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 컨센서스의 모태인 워싱턴 컨센서스의 핵심 논리도 포기한 셈이다. 미 경제정책연구소(CEPR) 딘 베이커 소장은 “IMF가 아시아 금융위기 때와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이라며 “이중 잣대(더블 스탠더드) 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요즘 유로존의 실물경제는 더블딥(경기회복 뒤 재침체)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이 -0.3%였다. 그리스·아일랜드·스페인·이탈리아 등은 심각한 상황이다. 경기 위축으로 실직자가 빠르게 늘고, 세금마저 제대로 걷히지 않고 있다. 이 여파로 재정적자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스페인 등은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 고강도 긴축을 강행하고 있다.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올리비에 블랑샤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요즘 시장은 정신분열적”이라며 “재정적자 악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동시에 긴축으로 성장률이 떨어지는 현상에 대해선 패닉 증상을 보인다”고 말했다.

 정작 메르켈은 베를린 컨센서스를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메르켈은 요즘 지방선거에 여념이 없다. 독일 유권자는 ‘그리스인 등의 낭비벽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고강도 긴축을 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런 유권자의 불만 때문에 메르켈이 베를린 컨센서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고 영국 가디언지는 분석했다.

베를린 컨센서스(Berlin Consensus)

유럽의 최대 채권국인 독일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공유한 생각. 그들은 위기의 원인이 지나친 빚이기 때문에 긴축은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도덕적 해이를 일으킬 수 있는 긴축 완화는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바로 구제금융과 재정 긴축 처방이 나왔다. 재정적자를 3% 이내로 줄이자는 유럽연합 신재정통합도 베를린 컨센서스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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