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석!이기업] 팬택, 모토로라와 국내 업계 최대 수출 계약

중앙일보

입력

지난 11월6일 미국 시카고 모토로라 본사. 계약서를 받아든 박정대(55) 팬택 사장은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머리 속엔 지난 두 달간 모토로라와 승강이를 벌였던 고비고비가 스쳐 지나갔다. 특히 계약이 거의 성사됐다 싶었는데 모토로라측이 모토로라 브랜드를 고집했던 순간은 그야말로 아찔했다. 모토로라 브랜드를 달려면 제작 기준이 까다로워져 그 만큼 비용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럴 경우 더 드는 돈은 한 대당 2.5달러. 계약 물량이 4백50만 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도저히 수출을 포기해야 할 판.

박사장은 아이디어를 짜냈다. 일단 설계를 바꾸고 부품 납품업체들과 가격협상을 벌여 제작단가를 낮췄다. 또 중남미쪽으로 나가는 팬택의 모델 2백50만 대 가운데 부품 형태로 수출하는 80만 대에 대해서는 ‘정액제 로열티’를 요구했다. 판매 가격의 일정 비율을 주는 통상적인 로열티 지급 방식보다 대당 1달러는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토로라는 기존 방식을 고수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팬택측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추가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모토로라 브랜드를 썼고 6억 달러 규모의 수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국내 단말기업체 수출건으론 가장 큰 규모였다.

“딜은 주고 받는 거죠. 우리가 모토로라의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도 나름대로 우리의 입장을 이해한 것 아니겠어요?”(박정대 사장) 협상 테이블에 나선 박사장의 두둑한 배짱과 치밀한 전략, 합리적인 대안 제시가 빛을 본 순간이었다.

CDMA단말기 전문업체인 팬택은 지난 91년 단돈 4천만원과 직원 6명으로 출발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팬택은 매출 3천억원에 대지 7천2백 평짜리 공장, 직원 6백 명을 거느린 매머드급 벤처로 컸다.

팬택은 출발 때는 무선 호출기를 주로 만들었다. 그 무렵 경쟁자가 없었던데다 호출기 붐까지 일어 고공비행이 가능했다. 특히 98년엔 한풀 꺾이던 호출기 비중을 줄이고 이동전화 단말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팬택은 이 무렵 모토로라를 만났고 수출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물론 팬택은 모토로라가 아니더라도 수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단말기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데다 정부가 보조금 제도까지 없앴기 때문. 당연히 국내 단말기 시장은 내리막을 걸었다. 게다가 시장은 이미 대기업들이 점령한 상태였다. 이 바닥에서 중소기업이, 특히 벤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수출 뿐이었다. 다행히 팬택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으로 모토로라에 단말기를 공급하고 있던 덕에 해외 시장 진출의 발판은 마련된 상태였다.

올해 팬택의 수출 목표는 1천4백억원. 지난 한 해 1백81억원의 9배에 가까운 수치다. 게다가 내년에는 이번 모토로라와의 계약으로 적어도 6천6백억원이 넘을 전망이다.

팬택이 이렇게 잘 나갈 수 있는 것은 ‘모토로라’라는 파트너를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탄탄한 기술력이 수출 경쟁력의 원천이다. 팬택은 직원 5백73명 가운데 연구인력이 1백39명이나 된다. 올해 연구개발비도 매출액의 5%인 1백50억원에 이른다. 팬택이 1백% OEM 방식에서 벗어나 자체개발 모델 주문자생산 방식으로 수출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2년간 파트너십을 맺어온 모토로라에 두터운 신뢰를 얻어낸 것도 뒷받침이 됐다. 모토로라는 팬택과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다른 파트너들을 물색하며 저울질을 했다. 그러던 모토로라도 비용 대비 기술면에서 팬택 만한 곳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팬택의 수출건은 ‘먹구름’이 잔뜩 낀 벤처업계엔 한줄기 ‘햇살’ 같은 소식이다. 외국 기업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 해외 시장에서 국내의 다른 기업까지 알릴 수 있는 계기도 되기 때문. 텔슨전자·세원텔레콤 등 팬택의 경쟁업체들도 얼마 전 노키아 등과 수출 계약을 잇따라 맺었다. 단말기업계 전체의 수출 전망이 한결 밝아진 것. 김화영 정보통신부 산업기술과 사무관은 “팬택의 이번 수출 계약건으로 한국 통신업체의 기술력을 입증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팬택은 모토로라건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이스라엘·인도까지 노리고 있다. 특히 메가톤급 시장인 중국을 놓고는 라이벌인 대만과의 한판 대결도 점쳐지고 있다.

다만 5~6개 업체만 살아남는다는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팬택이 롱런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일단 내실을 더 다질 필요가 있다. 신현호 LG투자증권 기업분석팀 과장은 “올해 순익이 2백억원에 이를 전망이지만 모토로라 계약건이 성사되기 전까지 수출이 지연되면서 3분기 실적은 적자였다”고 밝혔다.

사실 팬택은 지난 5월 생산설비를 40만 대 규모로 늘렸다. 휴대폰 판매의 속성상 짧은 시간에 많은 물량을 팔아야 하기 때문. 그런데 모토로라가 갑자기 주문량을 줄이고 내수까지 줄어드는 바람에 7월 한 달간 1만 대만 만드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팬택이 진정한 ‘수출 벤처’로 거듭나려면 ‘모토로라의 우산’을 벗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자체 제품을 개발, 로열티를 받기는 하지만 결국은 모토로라의 하청업체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잘 나가는 팬택이지만 한 번쯤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