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순애보', '실험'으로서의 합작영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영화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가. 영화 '순애보'는 그러한 조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다. 감독은 국내 연출자가 맡았지만 제작비와 배우들, 그리고 촬영과 조명 등의 파트를 각기 한국과 일본 스탭들이 나눠 전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쇼치쿠 영화사, 그리고 한국의 시네마서비스가 손잡고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순애보'는 양국의 메이져급 영화사들의 명실상부한 합작영화라고 칭할만하다.

연출자의 이름도 낯설지 않다. '호모 비디오쿠스'(1990)이라는 단편영화, '정사'(1998)를 만든 바 있는 이재용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의 스케일 면에서, 그리고 한일 문화교류의 시대적 흐름이 만들어낸 독특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순애보'는 양국 관객과 비평가들이 예의 주시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감독은 영화에 대해 "'정사'가 내 안에 있는 차분하고 정제된 느낌의 한쪽 끝이라면 반대편 극단은 아마 알모도바르의 키취적 취향에 가까울 것이다. '순애보'는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로 설명한다. '순애보'는 서울과 도쿄를 종횡무진 횡단하면서 각 나라의 청춘이 겪는 고독과 공허감의 고리를 연결하려고 한다.

영화에서 우인은 동사무소 공무원이다. 그는 자잘한 보고서 작성, 쓰레기 분리수거 확인 등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단조로운 일과를 마친 뒤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인터넷을 뒤적이는게 우인의 생활이다. 그런데 미아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우인은 끌림을 느낀다. 인터넷으로 '아사코'라는 여인을 발견한 뒤 그는 미아와 아사코라는 여성들을 이상형으로 점찍는다. 한편, 도쿄의 재수생 아야는 자살을 하기 위한 비용마련을 위해 아사코라는 이름을 빌어 성인용 사이트 모델이 된다. 서울에서 우인이라는 남자가 보낸 메일을 확인한 아야는 처음으로 그의 존재를 알게 된다.

'순애보'에선 한일의 배우들 면모가 일단 눈에 들어온다. '태양은 없다' 등에서 호연을 보인 이정재는 어눌하면서 정신적 고독에 찌든 우인역을 연기한다. 그리고 일본의 CF스타 다치바나 마사토는 무덤같은 가정을 벗어나 편안한 죽음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어하는, 20세 여성 아야역을 맡았다. 이외에도 오스기 렌 등의 일본배우가 출연해 예의 다채로운 연기력을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에서 일본 대중소설이나 일본영화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와이 슈운지 등 양국 신세대들의 애정세례를 받는 소설가와 영화감독들 영향이 은근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외로워 보이지만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마음 속 어딘가 여리디 여린 감성을 간직한 우인과 미아, 그리고 아야 등의 캐릭터들 모습에서 이같은 사항은 확인할 수 있다. 하기사 대중영화를 지향하는 작품에서 다양한 문화적 흐름을 흡수하는 점이 결코 영화의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는 없을 터다.

그럼에도 '순애보'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중영화는 아니다.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그들의 '고립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다. 드라마의 짜임새도 헐겁다. 영화는 인터넷으로 성인용 사이트를 뒤적이는 우인, 같은 사이트 모델인 아야를 중심으로 흐른다. 하지만 그들이 각기 처한 상황, 그리고 내적인 심리를 농밀하게 담아내기엔 상영시간이 역부족이다.

'순애보'는 판타지 요소도 겸비한다. 일상에 찌든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가상현실을 맛보고, 그 속에서 '현실'을 경험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점차 멜로의 형태를 갖추면서 결말로 치닫지만 캐릭터의 개인적 판타지와 고뇌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탓에 사실상 멜로적 감성 자체는 영화에 깊게 스며들 여지가 없다. 요컨대, 멜로라는 확실한 '장르'적 틀을 갖추진 못한 셈이다.

'순애보'는 성공적인 합작영화라고 평가하기엔 부족한 점이 눈에 띈다. 그것은 완결된 무엇이 아닌, 하나의 '실험'으로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