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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요즘 환율 쥐고 흔드는 ‘네 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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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외환은행 이건희 외환딜러는 요즘 아침마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유럽 재정위기만 지켜봐도 원화가치의 방향이 얼추 짐작됐던 지난해 하반기와 달리 변수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경제의 회복 속도와 유럽 재정위기, 중국·일본 경제 상황과 국제유가 등이 제각각 원화가치를 위·아래로 잡아당기고 있다”며 “예측이 훨씬 어려워져 신중하게 거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화가치 방정식’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공포가 조금 누그러들자 미국·유럽·중국·일본 등 한국 경제에 영향을 주는 거대 경제권의 수많은 변수가 한꺼번에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변수가 때에 따라 원화가치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경우도 많다. 원화 값의 방향을 알려면 복잡한 4차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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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7.7원 떨어진 1129.5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전날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공개한 지난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이 화근이었다. 직전 의사록에 비해 3차 양적완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는 이유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국채 등을 사들이는 것을 말한다. 추가 양적완화 가능성이 줄었다는 건 FRB가 돈을 더 찍어내 달러 값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얘기다. 이미 두 차례 양적완화를 했던 미국이 돈을 더 풀지 않아도 된다는 건 경제사정이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실제로 2009년 10월 10%까지 치솟았던 미국 실업률은 올 2월 8.3%로 내려온 상태다.

 하지만 3일엔 거꾸로 미국 제조업 지표의 호조가 원화가치를 올리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미국 경제의 호전이 원화가치를 때론 위로, 때론 아래로 잡아당긴다는 뜻이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미국 경제 상황 호전은 원화가치를 밀어올리는 쪽으로 작용했다. 세계적인 위기가 수그러드는 신호로 봤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규 실업수당 신청자가 4년 만에 가장 적었다는 뉴스가 달러당 원화가치를 3.2원 끌어올린 2월 24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상황이 바뀌면 같은 재료라도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 미 경제가 좋아지면서 추가 양적완화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소식에 원화가치가 떨어진 4일이 대표적이다. 외환선물 정경팔 투자분석팀장은 “미국 경제가 나아지면 FRB의 금리인상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며 “이 경우 달러 표시 자산에 대한 관심이 커져 달러 값이 뛰게 된다”고 말했다.

 연초만 해도 유럽 변수는 원화가치 상승의 훼방꾼이었다. 첫 거래일인 1월 2일의 경우 스페인 재정적자 확대 등 유로존 위기에 대한 우려로 안전자산인 달러 값이 뛰면서 달러당 원화가치도 4원 떨어졌다.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 강등 전망과 북한 경수로 폭발 루머가 겹쳤던 같은 달 6일엔 10.2원 급락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두 차례에 걸쳐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존 은행들에 장기 저리로 꿔 준 약 1조 유로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으로 흘러들어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외국인은 올해 1분기 석 달간 한국 주식 11조원어치를 순매수하고, 채권도 5조20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이때 외국인 투자자는 외화를 팔아 원화를 사기 때문에 원화가치가 오르게 된다.

 한국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경제의 둔화는 원화가치에 악재다. 중국의 2월 무역수지는 역대 최대인 314억8000만 달러(약 36조원) 적자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지난달 12일 달러당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6.2원 떨어졌다.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줄어들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연간 경제성장률을 8% 이상으로 유지한다는 바오바(保八) 정책을 포기하고 올해 성장률 목표치를 7.5%로 제시하기도 했다. 원화가치엔 우울한 소식이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하고 있는 일본의 영향은 좀 더 복합적이다. 최근처럼 엔화가치가 약세를 보이면 일본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올라가 가뜩이나 불안한 한국의 수출에 더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올해 1월 사상 최대인 1조4768억 엔의 무역수지 적자를 냈던 일본은 엔화가치 약세에 힘입어 2월엔 329억 엔의 흑자를 냈다. 일본이 한국의 수출시장을 잠식할 경우 한국의 경상수지가 나빠져 장기적으론 원화가치에도 부정적이다.

 4대 경제권 외에 국제유가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한국이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 현물유가는 3일 배럴당 2달러 오른 121.97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2011년 평균(배럴당 105.98달러)보다 15% 뛴 수준이다. 기름 값을 치르기 위해 그만큼 달러를 더 써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경제연구원 안순권 연구위원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는 상황에서 달러당 원화가치가 1100원보다 올라가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갈수록 늘어나는 외환거래 규모도 원화가치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거래는 2010년 하루 평균 418억9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468억30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금융위기 해결을 위해 선진국이 엄청난 돈을 풀면서 주식·채권·원자재 시장에서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변수 증가로 원화가치 예측이 어려워진 만큼 외국 자금의 급격한 유출입을 막기 위한 장치를 더 강화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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