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액세서리 ⑥ 추억을 자극하는 연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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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 고흐를 비롯해 여러 작가들에게 사랑 받은 카스텔9000 퍼펙트 펜슬. 2 드로잉과 스케치 작업에 주로 쓰이는 스태들러의 마스 루모그라프 연필.

연필 매니어들은 뾰족하게 깎은 연필로 깨끗한 종이 위에 ‘사각사각’ 소리 내며 글씨 쓰기를 좋아한다. 은은히 퍼지는 연필 냄새가 뭔지 모를 정겨움을 주고 하얀 종이 위에 또박또박 써 내려갈 때는 쾌감마저 느껴진다.

 글씨를 쓰다 보면 연필심의 품질과 심등급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심등급은 연필심의 진하기를 말한다. 예전만 해도 국내에서는 필기용으로 HB 연필을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쓰는 느낌이 더 부드럽다는 이유로 B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연필심에도 품질이 있는데, 글씨를 쓸 때 찌꺼기가 나오거나 지나치게 무르다는 느낌이 들면 좋은 연필이라 할 수 없다. 이런 부분들이 필기감에도 영향을 미쳐 매니어들의 호불호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연필심을 제작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독일 연필 브랜드인 스태들러를 예로 들면 연필심의 수분을 제거한 후 낮은 온도부터 약 1000℃까지 서서히 굽는 과정을 거친다. 이후에도 8시간 동안 온도를 낮췄다 높이며 굽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때 너무 빨리 냉각되거나 하면 심이 갈라지는 등의 불량이 생길 수 있다.

 심의 경도는 함유되는 흑연의 양에 따라 나뉜다. 연필의 경도는 2H, HB, F, 2B같은 글자로 표기되는데, H는 단단한 정도를 뜻한다. H앞에 있는 숫자가 높을수록 더 단단하며 진하기는 옅어진다. 반대로 B는 진한 정도다. B앞의 숫자가 높을수록 심은 진해지고 연필심의 경도는 무르다. HB와 F는 이 두 단계의 중간 등급에 해당된다.

 연필심을 만들 때 흑연과 점토의 비율이 맞지 않으면 심 경도를 제대로 구현해 낼 수 없다. 같은 HB등급의 연필이라도 브랜드마다 심의 진하기가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연필심을 감싸는 나무 역시 좋은 연필의 필수조건이다. 좋은 나무는 부드럽게 깎이고 깎은 후의 표면도 깔끔하다. 또 연필을 손으로 쥐었을 때의 그립감과 필기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매니어들은 연필 품질을 따질 때 ‘편심’을 유심히 본다. 편심은 연필심이 나무의 중간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말한다. 심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연필을 깎을 때 버려지는 부분이 많아 연필이 빨리 닳는다. 또 깎고 난 뒤에 측면에서 보면 연필심의 밑이 사선으로 돼있어 모양도 좋지 않다.

 편심이 없는 연필로는 주로 독일 브랜드들이 꼽히곤 한다. 177년의 역사를 가진 ‘스태들러’나 250년 역사의 ‘그라폰 파버카스텔’, 올해로 157년이 된 ‘스타빌로’가 독일 연필을 대표하는 브랜드들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세 개의 브랜드가 생겨난 지역이 모두 독일의 ‘뉘른베르크’라는 것이다. 당시 뉘른베르크는 로마로 가는 길목에 있던 교역도시로 산업활동에 필요한 도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다. 연필을 만드는 장인도 많았는데, 그 중 성공한 일부 장인들의 사업이 발전하며 지금의 브랜드가 된 것이다.

 100년을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진 브랜드다 보니 연필의 디자인 역시 100년씩 유지되곤 한다. 명품 연필 중에서도 매니어들은 다음과 같은 연필들을 꼽는다.

3 순은으로 만든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퍼펙트 펜슬.

노리스(스태들러)=100년이 넘게 유지된 스태들러의 대표적 연필로 노란색과 검정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특징이다. 노리스 120 연필 끝부분에는 왕관을 상징하는 문양이 빨간색과 흰색으로 중첩 인쇄 되어있다.

카스텔 9000(파버카스텔)=역시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은 연필이다. 1905년 퇴역장교 이자 파버카스텔 총수의 6대손인 알렉산더 폰파버 카스텔 백작이 구상해냈다. 책상에서 구르지 않는 육각형 연필의 시초이기도 하다.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애용한 연필로 유명하다.

마스 루모그라프(스태들러)=카스텔 9000과 자주 비교되는 연필이다. 두 연필 다 16개의 심등급이 있어 필기는 물론 드로잉과 스케치 작업에 용이하다. 마스 루모그라프는 연필 육각형의 면마다 심등급이 인쇄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6개 면에 모두 심등급을 인쇄하자면 작업공정이 추가되지만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포함해 연필의 품질과 프라이드가 결정된다.

그립2001(파버카스텔)=2000년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에서 ‘올해의 10대 상품’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인체공학적인 삼각그립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표면을 점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연필 표면에 작은 홈을 판 후 주사기로 친환경 소재의 페인트를 채우는 식으로 작업됐다.

 한편 만년필처럼 까다롭진 않지만 연필도 보관을 잘 해야 한다. 연필을 너무 습한 곳에 두면 나무 자체가 수분을 함유하게 돼 틀어짐과 같은 변형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 좋은 연필 고르기

- 같은 HB등급이라 해도 제조회사별로 진하기와 단단함의 등급에 차이가 있다. 직접 써보고 맞는 진하기와 단단함을 찾는 게 좋다.
- 심한 접착제 냄새가 나는 연필은 피하자. 나무와 심을 접합할 때 사용되는 접착제에 따라서도 연필품질의 편차가 생긴다. 또 한 다스에 든 12자루 연필이 모두 균일한 품질이어야 좋은 연필이다.
- 연필심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말하는 편심이 없어야 한다. 심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연필을 깎을 때 버려지는 부분이 많아 연필이 빨리 닳는다.

<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사진="스태들러·파버카스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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