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 강민철 "미모의 간호사 때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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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모가 뛰어나고 마음씨 고운 간호사 덕에 생에 애착을 느꼈다.”

 1983년 발생한 미얀마 아웅산 테러의 범인 강민철의 자백엔 미얀마 병원의 미인계도 작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송영식(72·사진) 전 외무부 차관보가 쓴 『나의 이야기』에서다. 5일 출간을 앞둔 이 책에서 송전 차관보는 29년 전 미얀마 주재 참사관으로 아웅산 테러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국제사회에 북한의 만행을 알리기까지의 생생한 현장 얘기를 펼쳐낸다.

 책에선 ‘국화’라는 암호명으로 극비리에 추진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막전막후와 그간 미스터리로 남았던 일화들이 공개된다. 송 전 차관보는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업무일지를 건네받기 위해 각료 10여 명이 도열한 단상 위에 올라갔다가 다시 계단 아래로 돌아왔는데 그로부터 몇 분 후 폭탄이 터졌다. 불과 15m를 차이를 두고 이들은 생사가 갈라진 것이다.

 송 전 차관보는 “사건 발생 전 미얀마 문공부 장관은 단상 위 우리 대표쪽이 아닌 묘소 입구로 향해갔는데 참 이상했다. 마치 사전에 무언가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또 사건 발생 한달여 후 어느날 북한 대사관 부지에서 연기가 솟는 모습을 발견했는데 직감적으로 ‘기밀문서를 태운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사망한 이계철 대사 대신 대사 대리를 지낸 송 전 차관보는 수사 과정에서 외교면책특권까지 포기하며 이같은 내용을 성실히 증언해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의심을 해소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남한의 자작극으로 몰아가려던 친북 성향의 미얀마 수사당국에겐 강민철의 자백이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 송 대사에게 뒷얘기를 전해준 미얀마 수사 담당국장에 따르면 실제 평소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아본 숫총각이었던 강민철에게 미인계는 강한 유인책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미얀마의 실세로 아웅산와 같이 독립운동을 같이한 네윈 의장이 2인자로 부상한 틴우 정부부장을 숙청하면서 정보기관의 기능이 급격히 약화돼 사전 테러 정보를 포착하지 못했던 점을 아쉬워했다. 송 전 차관보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대한민국 1세대 외교관으로서 냉전시대 정점의 치열한 외교전에 대해 후세에 알려야 할 때가 됐다는 신념으로 책을 썼다”고 말했다.

◆아웅산 테러=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했을 때 북파공작원에 의한 테러로 21명의 각료급 인사가 숨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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