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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MB의 사찰, DJ의 도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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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민간인을 사찰하는 건 중대한 범죄다. 청와대가 사건에 관여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진상을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사찰이나 은폐를 지시했다면 퇴임 후 그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 사죄로 끝낼 일이 아니다.

  민주당이 가혹하게 정권을 공격하고 있다. 박영선 ‘MB·새누리 심판 국민위원회 위원장’은 ‘대통령 하야’라는 단어까지 끄집어냈다. 하지만 이런 공세를 펴려면 민주당은 고해성사부터 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은 불법 사찰을 훨씬 더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총리실이 아니라 국정원이 주도했고 도청까지 자행했다. 민주당이 이를 덮고 MB만 공격하는 건 누워서 침을 뱉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이래 정권은 정보기관의 사찰(査察) 능력을 통치에 활용했다. 초기에는 주로 ‘망원(網員·스파이)’을 이용했다. 그러다가 노태우 정권 후반기에 “정보의 질을 높이자”며 본격적으로 도청팀을 운영했다. 이른바 ‘미림(美林)팀’이다. 팀은 미국산 장비를 들여와 안가(安家)에서 훈련했다. 많은 실패를 거쳐 도청 능력은 상당히 좋아졌다. 노태우 정권은 그러나 정권이양을 석 달 앞둔 1992년 12월 미림팀을 해체했다. 도청 테이프 수십 개는 파기했다.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를 외치면서도 미림팀을 버리지 않았다. 부활된 미림팀은 정치인·관료·기업인·종교인·언론인을 무차별 도청했다. 3년여 동안 생산된 도청 테이프는 1000개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정권이양이 다가오자 김영삼 정권도 미림팀 활동을 중단했다.

 도청은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 정권에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국정원은 신형 장비까지 만들어냈다.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R-2가 개발되면서 도청은 훨씬 쉬워졌다. 전화번호를 대량으로 입력하기만 하면 됐다. 팀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 CAS까지 개발해냈다. 2005년 검찰 수사에서 김대중 정권 때 도청당한 사람은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숨겨진 딸로 알려진 여성과 그 어머니를 1년간 도청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의 도청 책임자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결국 구속됐다. 노태우·김영삼 정권의 책임자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기소되지 않았다. 임동원과 신건은 집행유예가 되기는 했지만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2010년 7월 이 정권의 민간인 사찰이 불거졌다. 민주당은 신건 의원을 특별조사위원장에 임명했다. 한국 역사상 가장 방대한 도청으로 감옥에 갔던 이를 ‘사찰규탄’ 위원장에 앉힌 것이다. 스스로 부끄러웠던지 신건은 조용히 물러났다.

  노무현 정권도 불법사찰을 저질렀다. 국정원 직원은 넉 달 동안 유력 대권주자를 사찰해 나중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총리실은 국회의원을 포함해 다수 민간인을 사찰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임 정권보다 규모가 작다고 해서, 조직적 도청은 없다고 해서 이명박 정권의 불법 사찰이 면책될 수는 없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민주주의와 국민 의식이 더 철저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수억, 수십억원 비리가 횡행했지만 지금은 수백, 수천만원 비리로도 감옥에 가질 않는가.

 하지만 단죄(斷罪)의 잣대는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 5000만 국민이 이명박 정권을 규탄해도 민주당만큼은 자격이 없다. 지난 세월 그들이 했던 일을 언론과 국민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5년 집권 동안 세계사에 남을 도청과 불법사찰이 이뤄졌다. 그래서 정보기관 수장들이 사법 처리되기까지 했다. 미국으로 치면 CIA 총수 2명이 감옥에 간 것이다. 미국이라면 정권이 온전했겠는가.

 민주당이 가장 애용하는 전략은 ‘지우개 전법’이다. 거의 모든 걸 지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지우고, 제주 해군기지를 지웠다. 그리고 이번엔 국정원 도청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 정권의 총리실도 지우는 데 실패했다. 지우개가 지우는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