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리콘밸리엔 '모험'이 있다

중앙일보

입력

실리콘 밸리는 전혀 실리콘 밸리 같지 않았다. 지난 9월 초 찾았던 실리콘 밸리는 미국 경제의 엔진이요, 신경제의 심장부라고 보기에는 너무 조그맣고 한적했다. 고층 빌딩의 숲도 없었고 인파로 북적이지도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실리콘 밸리의 중심부 샌호제이로 이어지는 101번 산업도로의 좌우로, 특색 없는 저층 빌딩들만 이어질 따름이었다. 샌호제이 초입 도로 한 가운데 서 있는, ‘포브스’지가 세운 입간판만이 이곳이 실리콘 밸리임을 말없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곳에 고농도(高濃度) 자본주의가 있도다.

도대체 무엇이 고농도 자본주의, 진짜 자본주의란 말인가. 8박9일간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거기서 만난 벤처 기업인과 벤처 캐피털(venture capital) 관계자, 숱한 변호사들도 내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주지 못했다.

답을 얻은 것은 정작 실리콘 밸리를 떠나면서였다. 실리콘 밸리를 이루고 있는 많은 이해 관계 집단을 모두 만나고 나서였다.

그것은 위험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 극히 원시적이며 원초적인 형태의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의 시발점이라고 일컬어지는 대모험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이어진 이 시기는 현대적인 의미의 금융과 증권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이 당시 모험(venture)은 누군가 먼 바다 너머 황금의 도시에 관한 얘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됐다. 소문을 확신으로 바꾼 이 사람은 이제 돈을 대줄 만한 사람들을 찾게 된다. 선주(船主)를 물색하고 뱃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그리고 나서 깃발을 뱃머리에 높이 올리는 것으로 길고도 험난한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당시 모험의 방식은 실리콘 밸리 벤처 기업의 창업과 도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무수한 벤처 망해도 열기는 그대로

언젠가 만난 어느 국내 벤처 기업가가 벤처 위기를 재미있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실리콘 밸리는 많은 벤처기업들이 망했는데도 아직 벤처 열기가 식지 않았다. 반면 우리는 벤처 기업들이 별로 망하지 않았는데도 벤처 열기가 완전히 식어 버렸다.”

그 차이가 바로 모험에 대한 의식과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누구나 모험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돈을 댄 사람이나 선주, 뱃사람들 모두 그랬다. 심지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모험을 계획한 사람조차도 자신들이 심해(深海)의 물귀신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도전이 한낱 물거품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벤처 기업가와 벤처 캐피털, 변호사 누구나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또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최대 로펌인 윌손손시니앤굿리치社의 새뮤얼 남 변호사는 이 사실을 이렇게 요약했다.

“1백 명이 벤처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저희들에게 접근한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 한 20명 정도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 20명 중에 10명 정도에게 직접 투자하거나 투자를 권유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성공하는 것은 고작 1∼2명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달랐다. 벤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으며 대박의 꿈이었다. 정부나 언론, 벤처 캐피털 누구 하나 벤처기업이 1백 개의 기술과 아이디어 가운데 1∼2개가 성공하는 데 그치는 위험한 사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설령 이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투자자들 모두가 이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벤처 기업가들이 인터넷이나 신문에 ‘이런 기술과 아이디어로 언제까지 얼마를 버니까 돈을 대십시오’라는 광고를 내기만 하면, 언제든 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벤처 기업인에게나 투자자에게나 벤처 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정현준 한국디
지탈라인 사장과 같은 사이비 벤처 기업인, 무늬만 벤처 기업인이 설 땅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사람과 돈, 관심이 쏠리는 곳에는 가짜와 사기꾼이 출몰하게 마련이다. 훗날 ‘폰지 게임’이라는 경제 용어로 남게 된 찰스 폰지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부동산 개발 열기를 등에 업고 엄청난 돈을 끌어 모았던 인물이다. 높은 투자 수익률을 약속하며 투자자들의 돈을 끌어 모은 다음, 후발 투자자들의 돈을 처음 투자한 사람들에게 주는 방식으로 개발 계획의 규모를 부풀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업에는 한계가 있는 법. 개발 예정지에 태풍이 불어 개발 계획이 근사한 입간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기극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일부 벤처 기업인들과 벤처 업체들이 벌인 이런 식의 폰지 게임이 벤처 열기 전체를 완전히 죽여 놓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벤처 문화와 토양에서라면 제2, 제3의 정현준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하는 걱정이다.

미국의 전 재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이 퇴임 직전 지적했다시피, 시장 경제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신뢰는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흔들리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가 벤처 업체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의 폭도 클 수밖에 없다.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두려운 진짜 이유는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한 창업 열기야말로 우리 경제의 진정한 돌파구(breakthrough)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건 공연한 말의 성찬(盛饌)이 아니다.

80년대 이후 6차례에 걸친 대형 경제 위기를 겪은 나라들(80년대 초반 중남미 외채 위기, 87년 미국의 증시 위기, 90년대 초반 북구 금융위기, 92년 멕시코 위기, 97년 동아시아 위기, 98년 러시아 위기)을 살펴보자. 상당수 국가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위기 후 경제가 오히려 한 단계 상승한 나라는 미국과 북구 정도밖에 없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금융과 정보통신(IT) 산업과 같은 새로운 경제의 돌파구를 찾았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모든 분야가 과잉 투자·설비 상태인 우리나라로서는 그런 돌파구가 절실하다.

튜울립보단 철도붐과 비슷

16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는 튜울립 투기 붐이 벌어졌다. 관상용 튜울립의 뿌리 거래에 투기적 수요가 가세, 튜울립 한 뿌리가 마차 한 대 값을 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튜울립 뿌리 매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값은 폭락하고 투자자들은 파산을 면할 길이 없었다.

비슷한 열풍이 18세기 중반 대서양 양안(兩岸)에서도 있었다. 이번에는 철도가 그 대상이었다. 미국과 영국, 양국에서 철도만 깔아 놓으면 떼돈을 벌 것이라는 예측이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수많은 철도 업체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주가도 폭등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철도 업체들이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주가는 폭락했고 대부분의 철도 업체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 두 가지 예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흔하디 흔한 거품-폭발(boom-bust)의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경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튜울립 투기가 비생산적인 결과에 그쳤다면 철도붐은 생산적인 결과를 낳았다. 비록 주가는 폭락하고 철도 업체들은 망했지만, 철도는 대서양 양안 경제에 엄청난 활기를 불어넣었다.

경제 사학자들은 미·영 양국이 그 후 수십여 년간 철도로 인한 추가적인 경제 성장이 0.5∼1%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경험했던 벤처 열기는 튜울립과 철도의 예 가운데 어디에 해당될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철도붐에 가깝다. 경제의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높여 주는 인터넷을 널리 보급시킨 것은 물론 정보통신 산업이라는 우리 경제의 새로운 광맥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하 자금의 산업 자금화 효과까지 감안해 보라. 어떤 경우에도 벤처 열기를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의 벤처 열기는 일확천금에 눈이 어두웠던 우리들 욕망이 빚은 결과였다. 그러니 과연 누가 벤처에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우리 모두가 위험을 사랑하고 즐긴 것을. 다만 위험이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을 따름이다.

만일 우리가 그 점만 분명히 알고 있다면 위험을 사랑하고 즐긴 행위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경제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 놓을 수 있는 튼튼한 반석이라고 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