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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이제 ‘VIP’가 나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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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정애
정치부문 차장

엄지손가락 두 개를 곧추세웠다. ‘투 섬스 업(two thumbs up)’이다. ‘최고’라는 상찬이다.

 무뚝뚝한 인상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그러면서 빙긋 웃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미소였다. 이 대통령이 27일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의 마지막 일정인 특별만찬의 건배사를 하기 위해 단상으로 이동하려던 순간이었다.

 외국 정상이 이럴 정도로 외교무대에서 이 대통령은 화려했다. 유엔 총회 다음으로 크다는 핵안보정상회의를 무탈하게 이끌었다. 회담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선, 질문하려는 내외신 기자들이 여럿 손을 들자 “누굴 해야 하지”란 농담을 던져 웃음을 끌어낼 정도로 노련했다.

 양자회담에선 더했다. 만나는 정상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포기를 촉구하도록 했다. 줄기차게 북한을 감싸왔던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도 “북한이 위성 발사를 포기하고 민생 발전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를 낸 거다.

 정상들과의 친분도 두드러졌다. 10번 안팎으로 만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 주석만이 아니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꼭 알타이에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알타이는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수도에서 1200㎞나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런 외진 데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가깝게 느낀다는 뜻이다. 정상마다 “한국 기업이 우리나라에 진출해야 한다”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이 대통령을 두고 한 외신기자는 “가끔 기업인 출신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부러운 듯 말했다.

 분명한 건 거기까지란 거다. 이제 외교무대의 막은 내렸다. 다시 내치(內治)의 시기가 됐다. 이 대통령은 언젠가 “외국 정상들과 국익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다가도 서울공항에 발을 디디면 배추값 걱정을 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배추값 폭등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시절이다. 외교는 외교이고, 내치는 내치란 거다. 속된 말로 외교를 아무리 잘해도 내치를 못하면 말짱 도루묵쯤 될 터이다.

 요즘 상황에선 ‘배추값’을 민간인 사찰 논란으로 바꾸면 딱일 듯하다. 한때 국무총리실과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영포(영일·포항) 라인’ 주변을 맴돌던 논란은 이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대통령실장실을 거쳐 ‘VIP(대통령을 지칭하는 표현)’를 거론하는 단계까지 진행됐다. 사찰 여부를 다투던 사안의 성격도 사건이 축소됐는지, 처벌받은 사람들에게 돈이나 직장이 제공됐는지, 또 이 대통령에게 관련 사실이 보고됐는지로 바뀌고 있다. 법 위반을 다투면 됐던 일이, 이젠 법적으로 문제 삼기엔 애매하지만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소지가 큰 일로 변하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보고받았는지 여부가 그렇다.

 이 대통령은 그러나 근래 관련 답변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2월 22일 취임 4주년 기자회견 이후 6주째 언론인들과 만나며 수백 건의 질문을 받았지만 말이다. 다른 정치외교적 현안이 많았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만큼 단시간 내 사찰 논란이 청와대로 옮겨붙을 정도로 인화성이 컸다는 얘기도 된다.

 앞으론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은 사찰 관련 질문을 받고 또 받게 될 거다. 논란의 실체에 대한 답이 미진하면 질문이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될 거다. 두 차례 선거를 거치며 이 대통령의 답변을 두고 정치권은 물론 온 나라가 뒤엉켜 싸우고 또 싸우게 될지 모르겠다. 그사이 나랏일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까지 일하겠다는 이 대통령으로선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러니 이참에 제대로 답하고 제대로 풀어야 한다. 실체를 밝히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이틀 전 코엑스 오디토리엄을 둘러봤다. 50여 명의 정상이 넉 줄로 길게 늘어서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 곳이었다. 이 대통령은 실무진이 두 차례나 “믿어달라”고 호소할 정도로 꼼꼼하게 챙겼다. 그 덕에 서울 정상회의가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 거다. 이젠 민간인 사찰 논란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