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슨 웰스, 미국 영화의 가장 위대한 아웃사이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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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 감독의 꿈. 그 아련한 꿈 속에서 그는 어린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극장에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의 스틸 사진들을 훔치는, 영화에 대한 사랑에 흠뻑 빠진 소년으로서의 모습을 말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La Nuit Ameicaine, 1973, 비디오 출시 제목은 '사랑의 묵시록')
에 나오는 이 장면은 시네필로서 트뤼포 자신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영화 감독의 꿈을 심어준 그 사람에 대한 애정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트뤼포의 이 예에서 슬쩍 훔쳐 볼 수 있듯이, 오슨 웰스는 많은 영화 감독 지망생들의 우상이었다. 이미 트뤼포는 "1940년 이후 영화에 있어서 중요한 모든 것은 '시민 케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마틴 스콜세지는 웰스야말로 "영화사상 그 누구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 감독의 꿈에 부풀게 만들었다"고 칭송한 바 있다.

그렇듯, 웰스는 무수히 많은 영화 감독들의 따라하고 싶은 모델이자 교사였으며, 또한 다가가기 힘든 꿈이었다. 물론 웰스를 그렇게 만든 건 영화들을 통해 보여준 그의 놀라운 천재성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웰스의 천재성이란 것은 오히려 영화감독으로서 그를 옭아매는 쪽으로 작용했다. 불과 스물 여섯의 나이에 만든 영화 데뷔작 '시민 케인'만으로도 웰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가의 신전에 충분히 옹립될 만 했다.

웰스가 그 영화에서 보여준 '혁신'들은 그러나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 측에서 볼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재능을 대가로 웰스는 할리우드로부터 배척당했고, 유럽을 전전하면서 말도 못할 고생을 겪으면서 영화들을 만들었다. 비록 제작비 때문에 가혹한 상황 아래서 작업했지만 웰스의 다른 영화들도 그 어떤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걸작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웰스는 시스템 안에서 풍족하게 돈을 써가면서도 공허한 제품들만을 양산하는 그 많은 할리우드의 노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자유인'이었다.

웰스의 재능은 아주 일찍부터 개발된(또는 발견된)
것이었다.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이른바 '영재 교육'을 받은 신동이었다. 그러니 그의 재능이 일찌감치 꽃을 피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술가로서 웰스의 경력은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열 여섯 살쯤에 주연 배우로 무대에 선 그는 37년 스물 둘의 나이에 존 하우스먼과 함께 자신의 극단인 머큐리 씨어터(Mercury Theater)
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적지 않은 화제작들에서 연출과 주연을 맡으면서 연극계에서 이미 이름을 날린 웰스를 대중적으로 알려준 것은 지금도 가끔씩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라디오 '사건'이었다. 그 당시 웰스는 머큐리 극단 사람들과 함께 CBS의 주간 방송을 맡고 있기도 했었다. 그는 자신과 이름이 거의 같은 H. G. 웰스의 '세계 전쟁'(The War of the World)
을 라디오 전파를 통해 내보낼 생각을 가졌다. 38년 방송된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마치 뉴스 프로그램인 듯 가장해 뉴 저지에 화성인들이 침입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것이 진짜인양 착각한 사람들은 갑작스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미국에서 웰스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정도가 되었다(라디오에 대한 추억을 담은 우디 앨런의 영화 '라디오 데이즈'

1987)에는 이 사건을 다룬 짤막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웰스의 이런 유명세는 영화계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RKO라는 영화사가 상당한 개런티외에 예술적 통제권을 완전히 일임한다는 유례 없이 파격적인 조건을 들고 웰스를 찾아온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웰스의 화려한 영화계 입성은 그 자체로 수많은 영화인들을 샘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보기에 영화 경력이라곤 전혀 없는 애송이 청년에게 그처럼 엄청난 대우를 해준다는 것은 정신 나간 일로 보였고, 또한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초라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 조건 아래서 웰스가 만들어낸 영화가 그 어떤 영화사 책에서도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 걸작이며 영화사상 최고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꼽히는 작품인 '시민 케인'이었다. 여러 사람들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달되는 이야기 방식이나 딥 포커스, 천장을 보여주는 앙각 촬영, 사운드의 창의적 이용 등 스타일에서 분명 '시민 케인'은 하나의 기념비였다. 이렇게만 본다면, 웰스는 RKO와의 계약을 통해 얻은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할리우드로부터 다시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된다. '시민 케인'이라는 데뷔작을 끝으로 벌써부터 웰스의 고단한 영화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민 케인'이 흥행에서 실패한 후 웰스가 두 번째로 만든 영화가 '위대한 앰버슨가'이다. 산업화를 맞이하면서 몰락의 운명을 겪고 마는 미국의 귀족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RKO측은 웰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웰스가 '이츠 올 트루'라는 다른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려 브라질에 있는 동안 RKO는 멋대로 '... 앰버슨가'의 40여분 가량을 잘라버렸고 억지 해피엔딩 장면을 만들어 붙였다. 그렇게 개봉한 '... 앰버슨가'는 온전한 웰스의 영화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평자들은 그 영화의 우아함과 "평온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대중적으로는 또 실패였다.

웰스는 '시민 케인'과 '... 앰버슨가' 같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영화들말고도 이른바 '도덕적 오락물'이라 불린 영화들에서도 탁월한 성취를 거두었다. 그가 당시 부인이었던 당대 최고의 여배우 리타 헤이워드를 기용해 만든 '상하이에서 온 여인'은 영화사상 가장 바로크적인 필름 누아르라 할만한 걸작이다. 저명한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심지어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오슨 웰스가 만일 '시민 케인', '... 앰버슨가', '상하이에서 온 여인'만 만들었더라도 그는 영화사를 기념하는 개선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온 여인'도 대중을 자극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 혁신적인 상업영화 앞에서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곤혹스러워했다. 일례로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제작자인 컬럼비아사의 해리 콘 사장은 자신에게 이 영화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천 달러를 주겠노라고 격분해 했다. 이제 웰스는 할리우드가 자신에게 결코 다시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통감해야만 했다(물론 이로부터 약 10여년 후 할리우드로 돌아와 '악의 손길'을 만들긴 했지만, 이 걸작마저 차디찬 냉대를 받으면서 웰스는 재차 할리우드와 멀어졌다)
.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영화화한 '맥베스'를 끝으로 웰스는 미국을 떠나 오랜 유럽 유랑길에 오르게 된다. 이 후로 웰스는 영화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한 고투의 세월을 보낸다. 배우로서 웰스의 뛰어난 연기 능력이 그 자신에게 제작비를 조달하는 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유럽에서의 영화 만들기는 악조건과의 싸움 자체였다. '오셀로', '아카딘씨', '심판', '심야의 종소리' 등 그가 유럽에서 만든 영화들은 대체로 실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졌고, 다른 데서 의상을 빌리거나 아니면 아예 그것 없이 촬영되었으며, 필요한 돈이 마련되기를 기다려야 했기에 어떨 땐 수년이 걸리기도 했다. 예컨대 '오셀로' 같은 경우는 무려 4년이 걸려 완성된 영화였다. 그 긴 공백에서 나온 틈을 웰스는 아주 현명하게도 편집이라는 영화적 방식으로 해결했다(그리고 이 영화는 52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

이처럼 악조건을 헤쳐가면서 손대는 영화들마다 모두 걸작으로 만들어놓은 웰스는 그 어떤 범용한 영화 감독들이 범접할 수 없는 화려한 영화 세계를 축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85년, 70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위대한 거장이기도 했지만 거의 40여년 동안 외지를 떠돈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그가 제 대우를 못 받았다는 것은 죽은 그의 손에 수 개의 미완성 영화들이 남겨져 있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어쨌든 웰스는 뒤늦게 나마, 또는 유럽이라는 바깥에서나마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많은 거장들이 그렇듯, 그 역시 많은 평자들로부터 그만큼 많은 명칭을 부여받았다. 그를 두고 미국의 영화 평론가 앤드루 새리스는 "가장 젊은 위대한 미국 영화 감독"이라고 불렀고, 앙드레 바쟁은 "20세기의 르네상스 맨"이라고 불렀으며, 프랑수아 트뤼포는 "액션!"이라고 외칠 때마다 하찮은 현실을 시로 승화한 "시인"이라고 불렀다. 웰스 자신을 자기가 일개 실험가일 뿐이라고 말했다. "내가 지닌 유일한 가치란 과거의 규범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반드시 실험을 해본다는 것이다. 내게 힘을 솟게 하는 일은 오직 실험뿐이다. 알다시피 나는 예술 작품이나 평판, 혹은 후대의 명성에는 관심이 없다. 실험 자체가 주는 즐거움만이 나의 관심사이다. 오로지 실험을 할 때에만 나는 진정 나 자신이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말을 하기는 쉽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게 그것, 실험이다. 천성적으로 실험가라는 점, 그것이 웰스가 영화라는 것의 지평을 넓혀놓을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주요 작품 목록]

1941년 '시민 케인 Citizen Kane' (비디오 출시)

1942년 '위대한 앰버슨가 The Magnificent Ambersons'
1946년 '스트레인저 The Stranger'
1948년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
1948년 '맥베스 MacBeth'
1952년 '오셀로 Othello' (비디오 출시)

1955년 '아카딘씨 Mr. Arkadin'
1958년 '악의 손길 Touch of Evil'
1962년 '심판 The Trial'
1966년 '심야의 종소리 Chimes at Midnight'
1968년 '불멸의 이야기 The Immortal Story'
1974년 '거짓과 진실 F for Fake'

홍성남/영화평론가<antihong@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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