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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식 끝났다' 외친 이헌재 "새 모델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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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박정희식 경제 모델을 대체할 새 성장 모델로 ‘창의 경제’를 제시했다. 창의적 성장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와 함께 복지·분배·재벌 문제를 해결 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김성룡 기자]

넉 달 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박정희식 경제 모델은 끝났다. 새 모델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위기를 쏘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한 말이다. 그땐 아직 새 모델에 대한 구체적인 ‘감’은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연재가 끝난 지금, 다시 물었다.

 -새 모델에 대한 ‘감’이 좀 왔습니까.

 “얼개는 그려봤어요. 창의(創意) 경제라는 건데….”

 -창의? 이름부터 창의적이네요. 어떤 건가요.

 “창의적 성장이 핵심입니다. 창의적 기업이 속속 나와 큰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제,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창업에 몰리는 경제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양질의 일자리가 생기고, 복지·분배·재벌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열 번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 필수예요. 나라의 재원을 이쪽에 집중적으로 쏟아붓자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창업자금을 무한정 지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창업 기금을 만들어 해결하면 됩니다. 우선 연·기금을 활용합니다. 앞으로 30~40년 연·기금은 폭발적으로 커집니다. 그중 일부를 쓰는 겁니다. 달리 돈 굴릴 곳도 마땅치 않아요. 안전장치만 잘 만들면 됩니다. 예컨대 1조원짜리 창업기금을 생각해 보죠. 이 중 20%인 2000억원 정도를 연·기금으로 넣습니다. 배당이 생기면 1순위로 찾아가게 합니다. 2순위 20%는 일반 투자자, 3순위는 대기업의 사회 환원자금, 4순위는 정부의 창업지원금 따위, 5순위는 전략적 투자자 등으로 채웁니다. 이런 것들을 10개, 100개 만드는 겁니다. 물론 투자 비율이나 배당은 연·기금이 안전하도록 조정해야겠지요.”

 -3순위인 대기업 자금부터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확 커지겠네요.

 “재벌이 아예 사회환원용으로 창업기금을 대는 개념입니다. 재벌 입장에선 ‘대기업 배싱(bashing·때리기)’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 겁니다. 동반성장이니 공생발전이니 하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입니다. 4순위 정부 재정은 어차피 창업지원금으로 나눠줄 돈을 넣는 거니 전액 손실이 나면 본전, 조금이라도 회수하면 이득입니다.”

 ‘창의 경제’를 얘기하는 이 전 부총리의 눈이 잠깐 반짝 빛났다. 입꼬리도 살짝 치켜 올라갔다. 예의 흥이 날 때 표정 그대로다. 마치 창의 경제만 제대로 되면 일자리·성장은 물론 복지와 재벌 문제까지 ‘원샷’에 해결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총선을 앞두고 어디서나 복지 논쟁인데, 성장 얘기를 하셨습니다. 엉뚱하단 소리 안 듣겠습니까.

 “복지국가, 물론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됐습니다. 우리 헌법은 복지와 사회 안전망을 똑같이 보장하고 있어요. 정책도 헌법을 따라가야지. 복지와 안전망을 아우르는 쪽으로. 그런데 지금 정치권은 이념 투쟁하느라 가지 끝만 보고 있어요. 줄기와 뿌리는 생각도 않지. 복지 한다며 세금은 안 건드리겠다고 하거든. 복지국가로 가려면 세금 제도며 뭐며 다 바꿔야 합니다. 그런 논의를 진지하게 시작할 때예요. 그러려면 복지 재원인 성장 담론이 빠져선 안 되는 거고.”

 -‘따뜻한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쪽도 있습니다.

 “지속 가능하지 않아요. 감상적 접근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장 담론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연재 중 가장 논란이 된 건 역시 대우였다. 며칠 전엔 전직 대우맨들이 회고록 『대우는 왜?』를 냈다. 책 서문에서 “정부의 인위적 개입 때문에 대우가 시장 신뢰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이 전 부총리가 본지 연재를 통해 “대우 해체는 시장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다시 불거진 대우 해체 책임론, 씁쓸할 것 같았다. “뭐라고 한 말씀 하시죠” 했더니, 피식 웃고 만다. 처음엔 불끈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그냥 접기로 했다. “할 얘기는 ‘위기를 쏘다’ 연재를 통해 다 했다”고 했다. 물처럼 살겠다고 해놓고 다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며(그는 부총리 퇴임 후 한 지인에게 여천(如川·물처럼)이란 호를 받았다).

 그는 신문 연재 중 지인들과 일부러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이러쿵저러쿵 말 들리는 게 싫어서였다. 연재 분량도 애초 계획보다 줄였다. 왕자의 난과 대북송금으로 이어진 현대그룹 사태와 상해 이씨가 된 사연, 욱해서 치른 고등고시에서 수석 합격한 일 등 개인사 부분은 생략했다.

 -연재 중 말도 많고 탈도 많았을 텐데. 소회 한 말씀 하시죠.

 “지금 왜 다 지난 얘기를 하느냔 얘기가 많았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환위기를 6·25동란 후 최대 위기라고 합니다. 개개인이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공동체가 먹고사는 문제였기 때문이에요. 공동체가 겪었던 경험은 뭐가 됐든 소중한 거요. 기록에 남겨야 다음에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잘 대처할 수 있어요.”

 -요즘 경제 상황은 어떻습니까.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는 훨씬 괜찮은 것 아닌가요.

 “꼭 그렇게 안 봅니다. 위기 징후가 보여요. 97년 외환위기 때와 닮았어요. 눈에 보이게 해외 쪽 상황이 안 좋은데 총선·대선까지 겹쳤어요. 15년 전에도 그랬지요. 선거철이면 나가는 정부가 대책을 쓰기 힘듭니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책은 더 어렵죠.”

 그는 다시 위기의 냄새를 맡는다고 했다. 위기 땐 약한 고리부터 터진다. 그가 꼽은 약한 고리는 가계부채다.

 “이미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수준을 넘었어요. 가계부채는 금융 대책만으론 해결이 어렵습니다. 주택·건설을 포함한 종합대책이 필요합니다. 지금 금융 당국은 경직돼 있어요. 탄력적인 대응을 못 합니다. 너무 죄거나 풀지 않되 연착륙의 묘책을 찾아야 합니다.”

 운명론자를 자처하는 이 전 부총리, 그에게 위기는 운명이 점지한 또 다른 배필인지 모른다. 공직생활 대부분을 경제위기 극복에 썼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나라 경제 살리기 전문가, 금융 시스템 위기 해결사다. 그래서일까. 그의 마무리 말도 위기였다.

 “선거철엔 나가는 정부, 들어오는 정부가 같이 경제의 약한 고리를 신경 써야 합니다. 그래야 반복되는 경제위기를 미리 막을 수 있어요. 그래야 비용도 적게 듭니다.”

창의(創意) 경제

선진국을 모방해 온 제조업 중심의 경제 체제에 대응되는 개념. 정보기술(IT)·생명기술(BT) 같은 첨단 산업은 물론 농업·예술·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력을 발휘해 지금껏 찾지 못했던 새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국 경제학자 존 호킨스가 2001년 제시했던 ‘창의 경제’가 ‘문화·예술적 창조력을 활용한 산업’을 가리킨 경영학적 개념이었다면 이헌재 전 부총리는 경제 전반에 새 업종과 생산 방식을 도입한다는 경제학적 개념을 강조한다. 이 전 부총리는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대기업에서 안주하기보다 창업에 도전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젊은이들이 망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도록 연·기금 등이 참여하는 창업기금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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