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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의 심장과 영국 신사의 기품 한 몸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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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호 20면

재규어의 명차 E-Type과 창업자 윌리엄 라이언스 경. 1961년 출시된 이 차는 여태껏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차’의 하나로 꼽힌다. [재규어코리아]

재규어(Jaguar)는 어느 나라 차일까. 아직도 영국 차라고 답하는 이들이 적잖을 것이다. 좀 안다는 사람도 미국 포드를 꼽는 경우가 있겠다. 정답은 인도다. 원래 영국 귀족이 타던 영국산 차였지만 주인이 거듭 바뀐 탓이다. 1990년 포드가 인수했다가 2007년 인도 최대기업인 타타그룹에 팔았다. 과거 영국 식민지에 영국의 대표적 고급차 회사가 팔렸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침이 적잖은 재규어지만 디자인과 품격은 줄곧 영국 신사다웠다. 타타그룹은 차를 만드는 데에는 좀처럼 관여하지 않고 재무·관리 업무에 주력한다. 본사·공장과 연구센터가 그대로 영국에 있어 신차 개발이나 디자인을 주도한다. 그런 면에서 아직 영국 차라 해도 무방하겠다.

김태진 기자의 Car Talk 브랜드 이야기 ① 재규어

재규어 XJ

재규어는 최초의 영국산 자동차 브랜드다. 귀족적 디자인과 수작업의 장인정신, 레이싱(자동차 경주)으로 단련된 첨단기술이 조화를 이뤄 왔다. 원목이 들어간 인테리어는 고풍스러운 향취를 더했다. 또 한 가지, 회사 명부터 로고ㆍ엠블럼까지 모두 재규어란 맹수로 통일했다. 2007년까지 모든 재규어 모델의 보닛에는 재규어가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 ‘리퍼(Leaper)’를 달았다.

한밭대 디자인학부 구상 교수는 “재규어는 남을 모방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독창적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 뒷좌석이 좀 불편하고 실내가 다소 좁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도 재규어다움을 고수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네 개의 원형 헤드라이트와 우아한 보닛 곡선은 한눈에 재규어임을 알아보게 만든다.

E-Type 3.8,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차’
재규어의 모태는 1922년 모터사이클의 사이드카를 제작한 스왈로사이드카라는 회사다. 창업자는 영국 귀족 윌리엄 라이언스 경이다. 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회사 이름을 재규어자동차(Jaguar Cars Limited)로 바꿨다. 재규어의 날렵한 모양과 기품 있는 자태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48년에는 직렬 6기통 엔진을 단 경주차 XK120을 선보였다. 최고 시속 200㎞를 돌파해 당시 세계 양산차 중에서 가장 빨랐다. 재규어는 이 시절 자동차 레이싱을 휩쓸었다. 재규어의 ‘레이싱 유전자’는 이때 싹텄다. 당시 유럽 자동차 경주는 4개국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영국은 재규어의 전통 컬러인 그린, 독일은 실버, 이탈리아는 레드, 프랑스는 블루였다. 재규어는 50년대 르망 레이스에서 다섯 번 우승하는 등 주요 레이싱에서 시상대를 점령했다.

61년 세계 자동차 매니어를 깜짝 놀라게 한 명차가 나온다. 제네바모터쇼에 출품한 E-Type 3.8이다. 이 차는 지금까지도 자동차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차’의 하나로 꼽힌다. 출시 5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제네바모터쇼에도 다시 선보였다. 현장에서 만난 E-Type은 감동 그 자체였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만개한 자본주의, 그 덕분에 찾아온 60년대의 풍요로움이 물씬 느껴졌다. 요즘은 기름 냄새만 맡아도 굴러가야 하는 친환경차가 대세다. 그런 점에서 E-Type은 단순히 이동 수단을 넘어서 자동차에 인간의 꿈과 열정을 담아내는 예술의 영역을 맛보게 했다.

레이싱에서 명성을 쌓은 재규어는 68년 대형 세단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XJ6 설룬이다. XJ는 창업자의 이름을 딴 ‘라이언스 라인’이라는 우아하고 길쭉한 직선을 도입해 화제가 됐다. 후속 XJ12(72년) 모델은 돌풍을 일으켰다. 12기통 V12 엔진을 단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4인승 차로 잘 팔렸다. 이 차의 프로젝트명은 ‘실험적인 재규어(eXperimental Jaguar)’였다. 레이싱으로 자리잡은 재규어가 대형 세단 시장에 도전한 것은 큰 모험이었다. 오죽하면 프로젝트명을 실험이라고 했을까. 당시 소비자들은 자본주의의 풍요 속에 레이싱카처럼 잘 달리면서도 편안하고 넓은 차를 희구했다. 재규어는 이런 소비자의 심리를 읽고 스포츠 대형 세단을 내놓은 것이다.

재규어는 80년대 들어 파업이라는 영국병을 만나 품질불량으로 고전에 빠진다. 게다가 럭셔리카 시장의 경쟁 격화로 어려움이 가중됐다. 80년대까지 럭셔리카 시장은 독일 벤츠ㆍBMW와 영국 재규어, 미국 캐딜락이 주도했다. 하지만 대중차에만 머물 것 같던 독일 아우디와 일본 도요타가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판매 감소와 적자 누적으로 정부 관리에 들어간 재규어는 마거릿 대처 총리의 용단으로 90년 미국 포드에 팔려나간다.

문제는 포드의 지나친 간섭이었다. 2001년 나온 재규어의 첫 전륜구동 X-타입은 볼보 S80뿐 아니라 포드의 중형차 몬데오와 차체를 공유했다. 수십 년간 후륜 구동만 만들어 온 재규어에 포드식 변종이 나온 셈이다. 더구나 3000만원대 몬데오보다 값이 두 배가량 되는 X-타입이 같은 차체를 쓰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재규어의 프리미엄 이미지가 손상을 입었다. “포드가 영국 귀족 차를 포드식 컨베이어 벨트에 올렸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프리미엄은 브랜드만으로 대중차보다 수천만원 더 받을 수 있다. 프리미엄에는 ‘나만의 차별화된 것’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장진택 자동차 평론가는 “수작업을 앞세운 재규어에 포드식 대량생산 개념을 접목한 것이 실수”라고 지적했다. 결국 다른 차종까지 판매가 떨어지며 재규어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2007년 서광이 비친다. 포드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매물로 내놓은 재규어를 인도 타타그룹이 낚은 것이다. 그해 가장 영국적인 디자이너 이언 칼럼이 다시 재규어 디자인을 맡았다. 페라리에 버금가던 영국 스포츠카 애스턴 마틴을 살려낸 솜씨를 되살려 손상된 재규어의 이미지를 대수술하기 시작했다. 타타라는 새 주인을 만난 재규어는 2008년 중형 세단 XF를 내놓았다. 이름만 빼고 모든 걸 다 바꿨다는 이 차에서 재규어를 상징하는 네 개의 둥근 헤드라이트와 리퍼가 사라졌다. 칼럼은 “시대가 바뀌면서 넓은 실내공간처럼 소비자가 선호하는 요소를 강조하면서 디자인을 확 바꿨다. 하지만 레이싱 혈통과 재규어만의 유머는 곳곳에 살아 있다”고 설명한다. 고풍스러움을 버리고 현대화한 XF는 대박이 났다. 2010년 선보인 대형 세단 XJ도 디자인을 크게 바꿔 히트를 이어갔다.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차체를 만들어 경쟁 모델보다 100㎏ 이상 무게를 줄였다. 우주선 제작 기법인 리벳 본딩으로 조립해 더욱 단단해졌다. 뒷좌석과 트렁크가 좀 좁다는 지적도 최대한 수용했다. 이 시장의 강자인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 아우디 A8과 키를 맞췄다.

고풍스러움 접고 현대화007영화 단골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 재규어 디자인 총괄 이언 칼럼(사진)이다.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그를 세 번 만났다. 적당한 키에 부담스럽지 않은 얼굴이 남을 압도하지 않는다. 인터뷰 때마다 멋진 영국식 영어로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차분하고 알기 쉽게 풀어낸다. 마치 007 영화에 등장하는 차를 보는 듯 말이다. 재규어는 007 영화에 단골 출연한다. 그는 디자이너의 기본으로 스케치를 강조한다. 천재성보다 노력을 중시한다. 디자인 명문 영국왕립예술학교(RCA) 출신인 그는 동생 머리 칼럼(포드의 북미 디자인 총괄)과 함께 형제 자동차 디자이너다.

“재규어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요. 유려한 선뿐 아니라 앞모습에 익살스러운 웃음(유머)을 안겨 주는 여유가 있어요.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아 어딘지 여유가 없어 보이는 독일차 디자인과 다릅니다.” 칼럼의 자랑을 들으면서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 귀족 차가 익살을 이야기하다니.

재규어 디자인의 원형은 정글 맹수 재규어다. 고양잇과인 재규어는 평소엔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먹잇감을 발견하면 맹렬한 속도로 추격한다. 디자인 전문가들은 “영국 신사의 기품과 재규어의 폭발적인 동물적 특성을 두루 갖췄다”고 평한다. ‘빠르고 아름다운 차(Beautiful Fast Car)’를 만든다는 것이 재규어의 일관된 디자인 철학이다.

재규어는 변신을 거듭해 왔지만 특유의 유전자는 변치 않았다. 잘 달리고 섹시하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르릉~’ 시동 소리에 레이싱 시상대를 점령했던 준족의 혈통이 살아난다. ‘한번 제대로 달려 볼까’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딱딱한 독일 병정 느낌의 독일차보다 훨씬 정겹다. 익살스러운 미소로 주인을 반기는 재규어만의 디자인도 그렇다. 재규어 시트에 몸을 맡기고 시동을 걸어 보자. 맹수의 격렬함과 신사의 차분함을 동시에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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