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고랭지 채소로 둔갑한 1000만 명분 중국산 채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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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해 2월 관세청 서울본부세관 소속 조사관 5명이 강원도 평창군의 한 영농작업장에 들이닥쳤다. 이곳에 있던 인부들은 중국산 채소를 국내 ‘○○산’이라고 쓰인 포장지에 담고 있었다. 채소에 대기업 유통업체 비닐포장을 씌우거나 ‘대관령 고랭지 채소’ 등으로 표기된 망에 담는 이른바 ‘망갈이’ 수법이다. 조사관이 압수수색 영장을 내밀었지만 유통업자 A씨(51)가 고용한 10여 명의 인부들은 정신없이 작업을 계속할 정도로 현장은 분주했다. 같은 시각 다른 조사관이 현장을 덮친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창고는 납품을 기다리고 있는 ‘원산지 둔갑’ 채소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세관은 1년여에 걸친 추가 수사 끝에 A씨 등 4명이 1500t의 중국산 채소를 국산으로 속여 시중에 유통한 혐의(대외무역법 위반)를 확인하고, 이들을 검찰에 넘기기로 했다고 20일 밝혔다. 이들이 불법 유통한 물량은 한국인 1000만 명이 하루에 섭취하는 양과 맞먹는다. 특히 이들이 범죄에 이용한 영농조합법인은 그동안 국고지원까지 받아온 것으로 조사됐다.

 세관에 따르면 A씨 일당은 2009년 7월~2011년 2월 중국·대만에서 수입한 양배추·양상추·브로콜리·샐러리 등을 국산 채소로 둔갑시켜 왔다. 관청이나 유통업체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중국산과 국산을 섞어 포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작업장에 출입자 단속을 하고 직원에게 수시로 보안을 강조했다. 또 작업이 끝난 뒤에는 중국산으로 표시된 포장용 망 등을 불태워 증거를 없앤 것으로 조사됐다. 원산지가 뒤바뀐 채소는 중국산보다 최대 4배 비싼 가격으로 유통·식자재·제빵업체에 팔려나갔다. 조사 결과 이 같은 수법으로 이들이 챙긴 이익은 약 8억원에 달한다.

 세관 관계자는 “이들 일당의 원산지 세탁 판매로 대기업 유통업체를 믿고 구매한 소비자와 국산 고랭지 채소 재배 농가가 피해를 보았다”며 “수입 먹거리의 원산지 표시 위반행위 단속을 한층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A씨 일당은 조사기간 내내 혐의 상당 부분을 부인해왔다. 세관 측은 “‘원산지를 조작한 채소의 양이 조사된 것보다 훨씬 적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라고 전했다.

 한편 세관은 대기업 유통업체가 A씨 일당이 납품한 채소의 원산지 둔갑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조사하기로 했다. 세관 관계자는 “4개 유통업체가 수사선상에 있다”며 “이들 회사가 A씨 일당의 범죄 사실을 눈감아줬거나 공모했다는 의혹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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