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벽화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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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1505년)를 모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파울 루벤스의 작품으로 제작한 대형 걸개가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피렌체의 기자회견장에 걸려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발굴팀이 벽화 ‘마르시아노의 전투’의 갈라진 틈새로 초소형 내시경을 넣어 탐색하는 장면. [피렌체 로이터=뉴시스]

소실된 것으로 추정돼 전설로만 회자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앙기아리 전투’(1505). 이 걸작을 450년 만에 찾아낼 수 있는 실마리가 잡혔다. 한 이탈리아 출신 노교수의 40년 가까운 집념 덕분이다. 또 다른 걸작 벽화의 뒷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이 세상 빛을 볼 경우 이는 이집트 피라미드 발굴에 비견되는 것이라 전 세계 미술계가 술렁이고 있다. (영국 더 타임)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12일(현지시간) 미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공대의 마우리치오 세라치니 박사 등 연구팀은 이탈리아 피렌체 베키오 궁전(현재는 시청으로 쓰임) 내 ‘500년의 방’에서 다빈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안료 성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찾아낸 곳은 이 방의 한 벽면을 채우고 있는 조르조 바사리(1511~1574)의 벽화 ‘마르시아노의 전투’(1563)의 뒷벽이다. 연구팀은 바사리 벽화의 균열 틈새로 최신 소형 내시경 등을 집어넣은 결과, 벽 뒤쪽에 약 3㎝의 공간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곳에서 추출한 안료 성분을 분석한 결과 ‘모나리자’ 등 다빈치 대표작에 쓰였던 물감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명 ‘잃어버린 레오나르도’(Lost Leonardo)’라고 불린 이번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세라치니 교수는 “마침내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잡았다”며 감격했다. 공학도 출신으로 미술작품의 화학적 분석법 개발에 앞장서온 그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5년. 다빈치 전문가와 함께 ‘앙기아리 전투’와 관련된 역사를 공부하면서다. 그러던 중 베키오 궁전 바사리 벽화의 깃발에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Cerca Trova(찾으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를 보게 됐다. 그는 16세기 문서를 바탕으로 다빈치가 그림을 그린 장소를 찾았고, 현재의 벽화 뒤쪽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세라치니 교수는 “바사리가 차마 다빈치의 걸작을 훼손할 수 없어 새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자신의 벽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며 "과학 장비의 발전 덕에 작품을 발견해낸 걸 다빈치가 알면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앙기아리 전투’가 실제 발굴되기까지는 난관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현재 기술로는 바사리의 벽화를 훼손하지 않고 다빈치 벽화를 드러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탈리아 유적보호단체들은 “확인도 안 되는 작품 발굴을 위해 현재의 걸작을 훼손할 수 없다”며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청원운동을 하고 있다. 설사 발굴을 한들 450년간 빛 한 번 못 쬐고 습기에 방치됐던 작품이 온전하리란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다빈치의 전성기에 그려진 이 작품을 향한 세계 미술계의 관심은 뜨겁다. 마테오 렌치 피렌체 시장은 “두 작품 모두 보호돼야 한다는 원칙이지만, 만약 하나만 택하라면 다빈치를 택할 것”이라며 추가 발굴에 의지를 보였다.

강혜란 기자

◆앙기아리 전투(The Battle of Anghiari)=피렌체 공화국이 메디치가(家) 축출을 기념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의뢰한 시(市)의사당 벽화. 가로 6m, 세로 3m의 크기로 추정된다. 모티브는 밀라노를 상대로 한 전투 승리(1440년). 다빈치는 1505년 작업에 착수했지만 새로운 유화기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채 떠났다. 이후 메디치가가 다시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건물을 재건축했고, 1563년 조르조 바사리가 이를 기념한 ‘마르시아노의 전투’를 벽화로 남겼다. ‘앙기아리 전투’는 당대 미술계에서 다빈치의 최고 작품으로 칭송됐다. 1603년 파울 루벤스가 이를 모사한 작품이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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