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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현대의 '외줄타기' 그 끝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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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현대그룹의 외줄타기는 언제 끝날까. 기업·금융 구조조정의 걸림돌로 전락한 현대를 보면 왠지 대우사태를 연상케한다. 무려 10여 차례나 자구 계획안을 내며 시간만 끌다 병만 키웠기 때문이다. 현대의 충격파를 수습할 능력과 의지는 과연 있는가.

정부는 ‘칼집’만 잡고 소리만 냅다 지르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다 보니 외환은행도 정부와 현대측 눈치만 살피고 있다. 그나마 계열 분리로 그룹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는 줄어들고 있지만 현대문제는 DJ정권 내내 ‘애물단지’가 될 것 같아 걱정이다.

DJ정부에서 다 풀릴 문제겠어요?” 현대투신 부실, 1·2차 왕자의 난,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 “시장의 신뢰를 얻기까진 꽤 긴 시간이 걸릴 텐데 DJ정부가 수습할 능력이 있는지 답답하다”는 어느 재계 인사의 걱정처럼 현대문제는 이미 정부의 손에서도 벗어난 모습이다.

현대그룹의 위험한 외줄타기는 언제 끝날까. 지난 3월 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덧난 현대사태가 1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꼬여 있다. 특히 한국경제와 현대왕국의 젖줄이었던 현대건설은 기업·금융 구조조정의 걸림돌로 전락해 DJ정부의 애를 태우고 있다.

사실 올해 내내 금융시장을 뒤흔들며 복잡하게 얽힌 현대사태의 관전 포인트는 비교적 단순하다. 현대건설을 비롯, 현대그룹 한계기업의 부실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일가와 채권단이 어떻게 나누느냐다.

*** 부실 나누기가 관전 포인트

정부로선 특히 현대건설만 잘 요리하면 큰 고비는 넘길 수도 있다. 현대건설은 지난 10월18일 올 들어 4번째 자구계획안을 내놓는 수모를 겪고 있지만 대우그룹의 (주)
대우와 달리 현대그룹을 움직이는 지주회사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갖고 있는 계열사 지분은 현대상선(23.86%)
·고려산업개발(2.82%)
·현대아산(9.8%)
·현대중공업(7.85%->
0%)·현대전자(0.32%->
0%) 등이다. 이론적으론 현대건설만 장악하면 바로 현대그룹의 주인 노릇을 하며 ‘칼’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론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현대건설을 접수하려면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또는 출자전환이 불가피하다. 이는 그룹 해체와 오너 일가의 퇴진과 맞닿아 있는 문제다. 현대측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지금껏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대우사태로 빈사 상태에 빠진 금융시장이 현대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충격을 견뎌낼지도 의문이다. 채권단으로서도 부실이 더 늘어나는 부담을 안게 된다. 계열 분리, 지배구조 개선, 내부거래 차단 등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카드지만 쉽게 꺼내기 어려운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정부는 그래서 ‘칼집’만 움켜쥐고 있다. 대우호 침몰 뒤 1년이 흐른 지난 7월 금융시장에선 현대건설 워크아웃설이 파다했다. 이헌재 前 재경부 장관은 7월25일 기자간담회에서 “현대건설의 워크아웃은 없다”고 못박았지만 정부는 8월 들어 현대건설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방침을 은근히 흘렸다.

금융감독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현대가 정부와 시장을 상대로 계속 줄다리기를 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며 “현대의 자구책이 시원찮을 경우 워크아웃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물론 엄포는 엄포일 뿐이었다. 정부가 내심 바란 것은 좀더 현실적인 자구책이었다. 더군다나 부도 위기까지 몰린 현대건설은 서둘러 ‘8·13 자구계획안’을 내놨다. 5조4천억원이 넘는 빚 가운데 연말까지 1조5천억원을 줄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현대건설은 9월 말까지 목표액 5천9백81억원 가운데 3천9백2억원을 줄이는데 그쳤다.

그런 가운데 10월 들면서 현대건설의 사정은 더 나빠졌다. 10월 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와 기업어음(CP)
규모만도 3천9백억원이다. 올해 남은 두 달 동안 돌아올 3천6백억원보다 많은 금액이다. 신용등급은 ‘투자 부적격’이라 회사채나 채권담보부증권(CBO)
발행은 꿈도 못꾼다. 여기에 자구계획이 겉돈데다 살생부가 나돌면서 금융기관들은 더욱 몸을 사렸다.

심지어 2금융권에서도 현대건설의 목을 죄고 있다. 10월 들어 삼성생명을 비롯, 생보사들은 종업원 퇴직보험 연계 대출금 1천7백억원을 갚으라고 독촉하고 있다.

반면 지난해 45억 달러에 이르렀던 해외 공사 수주실적은 9월까지 26억 달러에 그쳤다. 현대건설 직원들은 다시 유동성 위기에 몰린 것은 경영진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다. 특히 김윤규 사장이 온 뒤 맡은 공사는 적자 투성이며 그나마 지금까지 버티는 것도 이전에 따놓은 공사 덕이라는 것.

여기에 현대투신증권 등이 AIG그룹으로부터 10월 초엔 받을 것으로 기대됐던 1조1천억원마저 그린버그 AIG회장의 청와대 담판이 끝난 뒤로 한 달여 미뤄져 현대건설로도 불똥이 튀었다.

현대측에서 자금지원 명분을 얻으려고 AIG측에 요구를 했다거나 금융시장 불안을 등에 업고 여론을 떠본다는 루머가 난무한 가운데 현대건설은 결국 10월18일 4번째 ‘백기’를 들고 말았다.

***'덮고 가자'는 정부에 은행 '쉬쉬'

현대건설 자금난이 이렇게 또 불거졌지만 정부로선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지난해에도 현대그룹 자금난 루머가 끊임 없이 나왔지만 쉬쉬했고 올 들어서도 계속 ‘일단 덮고 가자’는 분위기였다. 특히 지금까지 벌여 놓은 개혁작업 수습에 힘을 쏟으며 점진적인 구조조정에 나설 공산이 큰 진념 경제팀으로선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10월 들어선 금감위와 금감원 사이에도 혼선이 빚어졌다. 현대건설의 출자전환을 놓고 금감원측은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결정하면 따른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현대건설의 4번째 자구안을 끌어내며 현대건설 10월 자금난을 일단 봉합한 금감위측은 마지막 카드를 남발한다며 금감원측을 쏘아붙였다.

정부가 어정쩡한 자세다 보니 외환은행도 눈치만 보며 현대에 끌려다녔다. 특히 김경림 외환은행장의 현대건설 자구안 발표는 한편의 코미디였다는 평가다. 외환은행 고위 관계자 말처럼 ‘윗선’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현대건설 자구안을 대신 발표했다고 하더라도 “채권은행이 발표해야 신뢰성이 있다기?─굡遮?김경림 외환은행장의 변명은 너무나 궁색했다.

외환은행은 게다가 현대건설 여신을 다른 우량은행과 달리 ‘정상’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외환은행 여신심사부 현대반 관계자는 “은행이 결정할 문제”라며 대답을 피했다.

물론 외환은행으로서도 정부와 코메르츠의 증자(6천억원)
만으론 잠재부실을 다 커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은행 구조조정에서 목소리를 더 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이라도 들어가는 날엔 또 정부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외환은행이 출자전환을 반대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출자전환을 하면 당장 이자수입이 줄고 대손충당금을 더 쌓을 수도 있다. 출자전환으로 쌍용을 적극 밀어주고 이익을 챙기겠다는 조흥은행과 사뭇 대조적이다.

굿모닝증권은 10월20일 현대건설이 살생부에 오르진 않겠지만 짧은 시간 내에 시장의 신뢰를 얻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굿모닝증권은 현대건설의 자산총액이 99년 말 현재 9조2천8백39억원이지만 무수익자산이 25.7%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유동성 위기가 겉으론 빚이 많아 영업외수지가 악화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수익을 내기 어려운 자산구조가 더 문제라는 지적이다.

***MH는 득보다 실 많아

아무튼 정몽헌(MH)
현대아산 회장측은 적어도 두어 달의 시간은 벌었다. 다만 이번 자구안도 ‘악성종양’을 깨끗이 제거할 방법은 못된다는 관측이다. 현대건설은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화약고나 마찬가지다.

또 MH에겐 현대전자와 현대투신, 대북사업도 골칫거리다. 빚이 8조원에 이르는 현대전자는 이자로만 8천억원을 내야 한다. 그나마 지금은 반도체 경기가 꺾이진 않았지만 전망은 우울한 편이다. 더욱이 반도체는 해마다 뭉칫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대규모 장치산업이다. 이자 갚으랴 투자하랴 정신이 없는 셈이다.

청와대가 현대건설을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AIG그룹과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겠지만 기본적으로 부실 투성이인 현대투신도 투신권에 돈이 들어오고 증시가 잘 돌아가야 살 수 있다. MH는 특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 대북 사업의 수익모델을 빨리 내놔야 한다는 부담도 크다.

반면 지난 8월23일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정몽구(MK)
현대자동차 회장은 5월31일 정주영 명예회장의 ‘3부자 동반 퇴진’ 선언의 파문 속에서도 잘 버티고 있는 편이다. 이젠 현대측에서 현대건설의 전환사채(CB)
를 인수해 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다. 다만 MK는 지난 10월19일 고위 임원회의에서 “형제간 화해는 가족간 문제인 만큼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며 인수 거부 의사를 밝혔다.

정몽준(MJ)
현대중공업 고문은 형제기업인 현대건설을 지원한다는 명분에 계열 분리와 경영권 다지기라는 실리를 동시에 얻었다. MJ는 지난 10월20일 현대건설이 현대중공업 지분 6.9%를 넘기는 과정에서 자기 몫으로 2.28%를 사들여 지분율을 8.06%에서 10.34%로 늘렸다.

물론 그래도 현대중공업의 1대 주주는 MH 계열의 현대상선(12.46%)
이지만 계열 분리 방침에 따라 현대상선이 지분을 내놓을 예정인데다 MJ와 지분 격차가 2.12% 뿐이다. 재계에서는 MJ가 이번 지분 인수로 자동차 계열 분리 때와 달리 중공업이 자신의 몫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투자자와 주주들에게 계열 분리 이미지도 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현대건설은 회사채 만기가 몰릴 때마다 위기를 겪고 있지만 대주주 지분 정리나 계열사 분리 움직임 등에 힘입어 그룹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대우처럼 그룹 전체가 무너질 위험은 줄어들고 있지만 현대문제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난치병’이다. 10여 차례나 자구계획안을 내놓으며 시간을 끌었던 대우와 요즘 현대는 많이 닮아 있다. 현대문제는 또 빨리 낫게 하겠다고 수술을 하기도 어렵다.

유한수 CBF금융그룹 대표는 “지금까지 기아·한보·대우 등을 다루는 정부의 태도나 능력을 볼 때 덩치가 더 큰 현대를 어떻게 끌고 갈지 걱정”이라며 “이른바 ‘잔챙이’를 먼저 솎아내면서 시장의 신뢰를 조금씩 얻어나가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뎌질대로 무뎌진 칼을 쥐고 있는 정부와 눈치만 보는 채권단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거듭하고 있는 현대의 모습이 아슬해 보인다.

남승률 기자<nam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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