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기발함 뒤에 심오한 문제 의식이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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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머리, 가느다란 목, 섬세한 손가락. 소설가 조경란 님은 참 단아하다. 등허리께를 꼿꼿하게 세우고 비스듬히 창가를 내다보는 그이의 모습이 하나 흔들림 없다.

어스름 깔리는 황혼 녘이 제일 불안하다는 조경란 님은 아이스티 글라스 앞에서도 그이 특유의 섬세함을 드러낸다. 뾰족한 글라스는 금세 쓰러질 것 같아 너무 불안하다고. 글라스를 잡은 가느다란 손가락이, 창가를 내다보는 불안정한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듯도 하다.

조경란 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하나같이 황폐하고 스산하다. 데뷔작 '식빵 굽는 시간'의 주인공이 그렇고 최근에 나온 소설집 '나의 자줏빛 소파'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사막의 커다란 선인장 한 그루가 몸 한가운데를 휙 관통하고 지나가는' 느낌으로 휘청거리기도 하고, 반복되는 헤어짐으로 '관 속에 있는 듯한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니 눈부신 눈물일 수밖에.

자신에게는 무릎을 딱 치게 만드는 기발함이 없다고 조경란 님이 사뭇 비장하게 '고백'한다. 킥킥 웃음이 나오는 유쾌한 소설을 꼭 한 번 쓰고 싶다며 영국 작가 이완 맥완의 '암스테르담'(서창렬 옮김, 현대문학북스)
을 권한다.

우리에게 소개된 이완 맥완의 작품은 모두 세 편. 죽음, 부패, 근친상간이 난무하는 '시멘트 가든'(열음사 펴냄)
과 남녀 주인공들의 위험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사랑의 신드롬'(승영조 옮김, 현대문학북스 펴냄)
, 그리고 1998년 부커상 수상작인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은 몰리의 옛 애인들이 그녀의 장례식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돼요. 작곡가인 클라이브, 외무부 장관인 가머니, 신문사 편집국장인 버넌이 벌이는 황당한 사건들이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유쾌하게 펼쳐지죠."

이완 맥완은 인물의 생동감을 희화적으로 그리기 위해 그 특유의 신랄하고도 발랄한 블랙 유머적인 수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수법이 명쾌하기만 하다고.

"반전과 현란한 재담, 기막힌 발상 속에는 심오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어요. 이 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나 인간성이 우스꽝스럽게 왜곡되어 있다는 섬뜩한 진실과 대면하도록 만들어요. 사실 진실은 두려운 것이 아닐까요."

진실이 두려울수록 그곳으로 다가가고 싶은 유혹 역시 큰 법. 내면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에도 조경란 님이 계속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과 유리된 개인의 황폐한 삶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인 까닭이다.

그래도 반가운 것은 조경란 님이 작년보다는 올해, 올해보다는 내년에 더 환한 미소를 지으리라는 것이다. '이 생을 사는 동안 용서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한 용기도 생겼다'는 조경란 님이 그이의 소망대로 언젠가는 '블랙 유머가 가득한, 무릎을 딱 치는 소설'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황혼 무렵 오렌지색 운동복을 입고 서울대 고개길을 달리는 사람을 보면 반갑게 인사하길. 매일 저녁 삶에 대한 희망을 추스리고 새로운 길을 재촉하는 조경란 님이 바로 그 사람일 테니 말이다.

Joins 오현아 기자 <peru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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