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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0) 류샤오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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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이 발생하자 류샤오치는 비명횡사하고, 일가족도 수난을 당했다. 1967년 1월 6일, 칭화대학에서 열린 비판대회에 강제로 끌려나온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78년 겨울,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12년간 영어의 몸이 됐다. [김명호 제공]

1949년 5월 27일, 천이(陳毅·진의)가 지휘하는 제3야전군이 중국 제1의 공업도시 상하이에 입성하자 강남 최대의 밀가루 공장과 20여 개의 가족기업을 대표하던 롱이렌(榮毅仁·영의인)이 중공의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착취유공론을 편 류샤오치의 자본가 옹호정책은 그만큼 파급효과가 컸다.베이징의 약방 주인 웨쑹셩(樂松生·락송생)도 뒤를 이었다. 웨쑹셩은 1669년 강희제(康熙帝) 초년, 천하 명의(名醫) 웨셴양(樂顯揚·락현양)이 간판을 내건 동인당(同仁堂)의 당주로 설립자 웨셴양의 13세손이었다. 동인당은 옹정제(雍正帝) 시절인 1723년부터 청나라가 몰락하기까지 188년간 황실에 약품을 납품하던 약방이다. 중공은 이들에게 “홍색자본가”라는 기상천외한 칭호를 선사했다.

1953년 열린 재경공작회의에서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이 추진하던 토지개혁과 농업 합작화, 공사합영을 비판하고 나섰다. 마오는 류샤오치의 이름을 거론하며 위협 조로 말했다. “너라는 인간은 애초부터 사회주의 길을 가려는 각오를 한 적이 없었다.” 이날 마오는 회의 참석자들로부터 동조 발언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연단을 내려오는 마오의 얼굴에 경악한 모습이 역력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류샤오치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장정(長征) 시절부터 애지중지하던 동북왕 가오강을 베이징으로 불러 올렸다.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에 임명하며 극비 지령을 내렸다. “1929년 8월, 류샤오치가 동북에서 국민당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조사해라.” 죽지 않고 살아서 풀려난 것을 보면 뭔가 수상하다는 식이었다.마오쩌둥의 신임에 흥분한 가오강은 귀신도 모르게 임무를 완성했다. 후일 문화혁명이 발발하자 류샤오치를 체포하고 반도(叛徒)로 규정하는 근거가 될 자료를 마오에게 건넸다.

가오강은 류샤오치의 추종자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하는 족족 들통이 났다. 당내에 분란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마오는 가오강을 버렸다. 류샤오치를 일거에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의 불만을 모를 리 없었다. “일하는 방법이 틀릴 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일”이라며 마오와의 대결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대신 가오강에게 권한을 침해당한 정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와 연합했다. “주석의 깃발을 멋대로 휘두르고, 반당 활동을 자행한다”며 가오강을 공격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난날의 동지 천윈(陳雲·진운)에게마저 호된 비판을 당한 가오강은 다량의 수면제를 삼켰다.

가오강 사망 1개월 후인 1954년 9월, 정무원은 223차 회의에서 전격적으로 공사합영(公私合營)안을 통과시켜 마오쩌둥의 체면을 살려줬다. 국가자본주의 시대가 열리자 롱이렌에게는 상하이 부시장 겸 방직부 부부장, 웨쑹셩에게는 베이징 부시장 자리를 안겨줬다.류샤오치의 천거로 당 총서기에 선출된 덩샤오핑은 “국내의 중요한 모순이 적과의 모순인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모순은 낙후한 생산력과 날로 수요가 증가되는 인민의 물질문화 간의 모순”이라며 대놓고 류샤오치의 정책을 지지했다. 후일 류샤오치에 이어 당내 두 번째 주자파로 몰리기에 손색이 없는 발언이었다. 경제보다는 계급투쟁이 먼저라는 마오쩌둥의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계급투쟁 종식론”이나 다름없었다.

문혁이 끝나자 덩샤오핑은 좌파를 경계하며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지만 류샤오치는 그렇지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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