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러시아인이 선택한 건 자기 돌봐줄 '아빠 국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1호 11면

안성규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통령 당선은 러시아에 어떤 의미일까. 서방의 불공정 시비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얻은 64%의 지지는 모스크바를 급속도로 안정시키고 있다. 그러나 3월 4일 러시아 대선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요즘 모스크바에서 떠오르는 ‘러시아 고등경제대학’의 안드레이 멜빌(사진) 정치학부 학장은 아주 냉소적이었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을 만큼 거칠다. 민주 러시아의 모습이 이런 것이지 싶다. 6일 그를 시내 대학에서 만났다.

러시아 고등경제대학 멜빌 학장이 보는 푸틴 당선

-푸틴의 승리에 대한 러시아 시장의 반응은 흥미롭다. 지난 두 번의 대선 때 푸틴 당선 직후 주가가 1%씩 떨어졌는데 이번엔 오히려 1% 넘게 상승했다. 서방이 부정선거라고 비난하는 데도 그렇다. 뭐라고 생각하나.
“서방의 태도는 복잡하다. 부정은 있었다. 러시아 중앙선관위도 인정한다. 얼마나 심각하냐는 것인데…. 일부는 부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몇몇 사례는 사법부로 갈 것이다. 어떤 사람은 푸틴의 득표가 64%가 아니라 50%라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 심각한 게 시스템 자체라고 본다. 지난 12년 동안 형성된 시스템 아래서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는 불가능하다. 정치ㆍ경제 영역에서 경쟁을 거부하는 단일 권력(모노파워), 권력이 전혀 교체되지 않고 권력을 변화시킬 수 없는 시스템이 부정선거 시비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푸틴 앞날의 전망이 부정적이란 것인가.
“어느 정도 저항은 계속될 텐데…. 그게 요즘 극렬화하면서 위험해지고 있다(전날인 5일 시내 푸시킨광장에선 반대파의 시위가 있었다. 경찰이 해산시키자 텐트 시위를 시도했다. 드물게 격렬한 장면이다). 그런 저항에 대응도 극렬해지고 있다. 역사를 보면 평화적 시위만이 리더십에 효과적 영향을 미친다. 극렬 시위는 파국으로 가는 길이다. 가까운 미래에 푸틴에게 기대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뭔가는 있을 것이다. 주지사 직선, 정당 창당, 지방자치와 관련된 기준(현재 아주 엄격하다) 완화 같은 게 있다. 조금의 자유, 약간의 부패 청소 등은 있다. 그러나 개인화된 권력, 신단일 패권, 패트리모니얼리즘(개인과 권력이 구분 안 된 시스템), 권력과 통합된 부 같은 것은 개선하지 못한다. 시스템이 이걸 막는다. 시스템은 푸틴이 만들었지만 변화는 못 시킨다. 러시아의 자원경제에서 렌트(자원 수입)는 정치ㆍ경제의 힘이다. 그것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비즈니스 그루핑과 엘리트 내의 집단은 다 렌트에 기초해 조직돼 있다. 이는 변하지 않는다. 제한적이고 표면적인 변화만 있을 뿐이다.”

-러시아의 특권인 자원 렌트 경제를 즐길 수 있지 않나.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경쟁의 측면에서 볼 때 이는 파국으로 가는 길이다. 러시아는 선진국에 한참 뒤처져 있다. 경제 현대화와 산업 다원화, 기술 발전, 이노베이션 같은 것이 없으면 러시아는 지대국가에 머물 것이다(학술용어로 자원의 저주다).”

-그러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그래 왔고 푸틴도 이번 선거 과정에서 산업 현대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의 경쟁력을 모델로 두 번씩 거론했다.
“산업 현대화를 역설하는 많은 말은 모두 말뿐이다. 나는 어떤 추진력도 못 봤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5개 중점 육성 분야(원자력·통신·IT·의료기기·에너지 효율화 분야)를 3년 전부터 말해 왔지만 진전이 없다. 메드베데프는 현대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희망했지만 환상으로 끝났다. 푸틴과 그의 사람이 현대화로 이끌 것이란 환상을 나는 안 갖는다. 체제의 이익은 그들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너무 극단적인 주장 아닌가.
“나는 현실주의자다.”

-자원 수입이 현대화에 동원되지 않았나.
“최근 3년 전, 2년 전, 1년 전을 들여다봐라. 수입을 현대화와 기술 혁신에 쓸 수 있었지만 돈은 증발됐고 갈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면 그 많은 지지는 뭘 말하는가.
“안정 희구다. 시장은 어떤 안정이라도 그걸 희구한다. 그러나 이는 비민주화되고, 렌트와 부패에 근거한 안정이다. 푸틴 지지자들은 연금 생활자들이다. 푸틴이 연금을 늘릴 것이라고 해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을 어디서 가져올지는 불확실하다.”

-유가가 오르면 되지 않나.
“그럼, 떨어지면?”

-지금 계속 오른다.
“앞으로는 모른다. 경제ㆍ금융 전문가들은 다른 시나리오를 말한다. 어떤 이는 군 개혁, 사회보장 공약에 들어갈 예산은 감당이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석유 수출(총수출의 67%) 수입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게 계속될까. 약속이 실현 안 되면 진짜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푸틴은 개혁을 위해 뭘 해야 하나.
“나는 비관적이다. 현 상태가 계속되고 소규모 변화만 가능할 것이다. 푸틴은 새로 구성할 팀에 국가보안위원회(KGB)나 권력기구에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시스템을 손봐도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정도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옛날에는 올리가르히(부에 권력이 결합된 것)가 지배했지만 지금은 실로가르히다. 권력에 부가 결합된 세력이다. 푸틴은 그들에게 의존한다.”

-그래도 푸틴은 위대한 러시아를 말했으니 뭔가를 하고 또 중산층의 불만은 해소시킬 필요가 있다.
“중산층은 불만이 없다. 그들은 만족한다. 사회보장을 누리고, 소득이 늘고 있고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는 많다(러시아 중산층은 최대 25%). 모스크바의 저항은 중산층과 관계없다. 그들은 배고프지 않다. 지난해 두마선거 이후 벌어진 12월 5일 시위 이후를 자세히 보라. 그들은 존중, 자유, 공정한 선거 같은 것을 요구한다. 이들의 시위는 아직 정치·사회적 운동이 아닌 모럴 무브먼트(도덕적 운동)다. 그게 사회ㆍ정치적 요구로 발전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정치적 요구는 나발느이 같은 극단적 그룹의 목소리다.”

-그럼, 저소득층은 왜 푸틴을 지지했나.
“내가 알기론 저소득층 대부분이 사회보장 연금 때문에 주가노프가 아니라 푸틴을 지지했다. 안정과 보장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기 손에 들어오는 현실을 중요시한다.”

-러시아 국민은 왜 그럴까.
“독립적인 사람도 있지만 많은 러시아인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흥미가 적다. 하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된다. 수동적이며 전통적으로 순종적이다. 그들은 자기를 돌봐주는 내니 스테이트(유모국가), 대디 스테이트(아빠국가)를 원한다.”

-푸틴이 어디까지 개혁을 할까.
“이노베이션이라든가 산업 다양화·현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정적이며, 현상 유지는 된다. 일종의 무기력(이너셔)이다. 많은 사람은 안정적으로, 3분의 1은 반대하며 살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