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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진 말하셨죠,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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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28면

중앙포토

현재 지구상에서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3억5000만 명에 이른다. 언어별 인구 순위론 중국어와 인도어에 이어 3위다. 스페인어를 제2 외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까지 합치면 5억2000만 명이 된다. 스페인어는 유엔 6개 공용어 중 하나다. 특히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의 증가로 미국의 제2 언어가 되면서 스페인어는 국제 언어로서 비중을 높이고 있다.하지만 스페인어권을 대표하는 유명 가수는 많지 않다. 1960~70년대에 활약한 멕시코계 미국인 트리니 로페스, 푸에르토리코 태생의 호세 펠리시아노,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활동한 푸에르토리코 태생 리키 마틴(엔리케 모랄레스), 그리고 멕시코 가수 루이스 미겔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뛰어난 가창력과 흥행성을 모두 갖춘 라틴팝 가수가 한 명 나타났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사진)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라틴팝 황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레알 마드리드 2부 리그 골키퍼 출신
그는 43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는 스페인 서북부 갈리시아 태생이며 작가인 어머니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 세파라디 유대인 가계 출신이다. 훌리오는 계율을 충실히 지키는 유대인이 아닌 정체성이 희미한 세속화된 유대인이다. 그런데 그가 한때 미국 LA에서 랍비 양성 과정을 수강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자신의 내면적 유대인 정체성은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유복했지만 부모의 사이가 좋지 않아 어린 시절 훌리오는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래서 축구 등 스포츠에 몰두했다. 장래 프로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유소년 축구팀에 가입해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 후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다. 처음엔 2부 리그에서 골키퍼로 뛰면서 프로축구선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런데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19세가 되던 해 친구와 마을 축제에 다녀오다 타고 있던 차량이 전복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척추와 하반신이 마비돼 무려 5년간 병원 신세를 졌다. 의사인 아버지의 정성스러운 간호와 조언과 함께 치료와 재활에 매달렸다. 하루 여섯 시간 수영도 했다. 아버지는 항상 “그래도 인생은 계속 된다”고 말하며 아들을 위로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라고 훌리오에게 기타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혼자서 기타를 익혔다. 작사도 하고 곡도 만들었다.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병상의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다 기적이 일어났다. 24세가 되던 해인 67년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인 상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어학에 취미가 있던 훌리오는 퇴원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 부설 영어 학원을 다녔다.

68년 드디어 가수로 화려하게 데뷔한다. 스페인 베니도름 국제 송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가 부른 노래 제목은 ‘그래도 인생은 계속 된다(La Vida sigue igual)’다. 바로 아버지가 절망에 빠진 훌리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에 그가 가사를 붙였다. 음반사 CBS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70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스페인 대표로 출전해 4위를 차지했다. 이후부턴 승승장구다. 훌리오의 히트곡은 줄잡아 150곡쯤 된다. 그중 가장 사랑받은 곡은 ‘마누엘라’(74), ‘헤이’(80), ‘데니냐 아 무헤르’(81)’, 그리고 러시아 전통민요 ‘검은 눈동자’를 편곡한 ‘나탈리’(82) 등이다. 이 중 ‘헤이’는 여성 팬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노래다. 감미롭기는 하지만 다소 느끼한 음색의 훌리오 노래는 여성, 특히 중년 여성의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왔다.

훌리오는 45년에 가까운 가수 경력 중 몇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78개의 단독 앨범을 찍었다. 2010년 11월 기준 3억 장의 앨범을 판매했다. 가장 많은 언어로 앨범을 제작해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4500회의 대중 공연을 가졌다. 라틴팝 부문 그래미상을 두 차례(88, 96년) 수상했다. 명가수들과 듀엣으로도 노래했다. 프랭크 시내트라, 다이애나 로스, 스티비 원더, 나나 무스쿠리 등이다. 히트곡 중 일부를 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포르투갈어·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로도 불렀다. 미국 마이애미에 거주지를 두고 있지만 파리에도 자주 나타난다. 최근엔 튀니지 전통 음식에 흥미를 갖고 파리의 한 튀니지 식당에서 요리를 배운다고 한다. 2010년엔 20년간 연인으로 지내던 21세 연하의 네덜란드 모델과 재혼해 많은 화제를 뿌렸다. 2011년엔 ‘누메로 우노’란 새 앨범을 냈다. 그리고 아직도 공연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그는 항상 “무대에서 쓰러지는 날까지 노래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막내아들인 엔리케도 가수로 인기를 얻고 있지만 가수론 고령인 그도 이에 지지 않고 계속 무대에 선다. 얼굴은 늙어도 목소리는 늙지 않기 때문이다.

88 서울올림픽 전야제에 참석
훌리오는 한국과 인연이 있다. 그는 88 서울올림픽 전야제 성격의 프레올림픽 쇼 행사에 참여했다. 96년 1월에도 왔다. 2010년 8월엔 내한 공연이 예정됐다가 컨디션 난조로 방한이 취소된 적이 있었다.결과론이긴 하지만 훌리오에겐 젊은 시절의 교통사고가 전화위복이 됐다. 만약 그가 레알 마드리드 구단의 1군 선수로 뛰었다 하더라도 30대 중반이면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을 딛고 가수로 인생항로를 바꾼 후 부귀와 명성을 모두 얻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운만 좋아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가수로서 가장 중요한 기본기인 탁월한 가창력, 엔터테이너로서의 천부적 자질, 그리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자신의 행로에 대한 자부심과 성공을 위한 의지 모두가 합쳐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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