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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전쟁·이별 담담히 추억하며…아이들은 한 뼘 더 자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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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그 해 봄은 더디게 왔다
페터 반 게스텔 지음
이유림 옮김, 돌베개
399쪽, 1만3000원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와 츠반의 이야기, 나와 베트의 이야기, 암스테르담의 추위와 얼음 이야기, 그리고 얼음이 녹아 이 모든 것이 끝난 날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되는 책은 2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지나간 194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펼쳐진 세 아이의 우정과 사랑,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성장기이자, 잔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에 대한 기록이다.

 전쟁은 약자에게 더 큰 상흔을 남긴다. 주인공인 토마스 프레이와 그의 친구 피에트 츠반, 츠반의 사촌 누나인 베트는 전쟁 중에 부모를 잃었다. 토마스의 엄마는 전쟁이 끝난 몇 달 뒤 크리스마스 때 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츠반의 엄마와 아빠, 베트의 아빠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다.

 부모의 죽음을 경험한 세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꽁꽁 싸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조금씩 침묵을 깨고 상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토마스는 베트에게 처음으로 엄마의 죽음을 털어 놓고, 츠반은 홀로코스트(대학살)의 광풍 속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친구 집 다락에 숨어 지내며 목숨을 부지했던 츠반. 그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더 괴로운 것은 모든 고통에 비켜서 있었다는 것이다. 츠반은 말한다. “가장 끔찍한 일은 내가 아무것도 함께 겪지 않았다는 거야. 굶주림의 겨울도, 일제 검거도, 나는 유대인들이 자기 집에서 끌려 나오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내가 유대인이라는 것조차 나는 몰랐어”라고.

 속내를 털어 놓고, 서로를 다독이며 악몽과 같은 기억과 마주선 아이들은 껍질을 깨고 한결 어른스러워진다. 츠반은 삼촌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베트는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유대인의 나라에 가서 살겠다고 결심한다. 친구와의 이별에 괴로워하던 토마스는 츠반도 자신을 그리워할 것이라 믿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책은 대놓고 상처를 헤집지 않는다. 쥐어짜는 감정의 과잉도 없다. 담담함 속에 아픔이 전해져 온다. 그 아픔을 헤쳐 나온 아이들은 한 뼘 더 자랐다. 어른이 되는 것은 그렇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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