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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바둑이야기-인생 축소판 바둑판과 바둑돌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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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서봉수 9단은 젊은 시절 “바둑은 나무로 만든 판 위에 돌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고 말해 단번에 독설가의 지위를 얻었다. 서 9단은 원시인의 돌도끼를 연상하는 표현으로 바둑을 가볍게 깔아뭉갰다. 하지만 서 9단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나무로 된 바둑판 361로는 온갖 욕망을 지닌 돌들로 가득 채워졌다가 승부가 끝나면 다시 텅 빈 바둑판으로 돌아간다. 돌을 쓸어 담은 뒤 남은 그 텅 빈 바둑판이야 말로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바둑판의 으뜸은 비자판이다. 비자나무는 색상이 금빛이고 향이 좋으며 탄력이 있다. 금색이라고는 하나 은은해 품격이 있다. 향도 비자나무 향은 거슬리지 않고 편안하다. 돌을 놓으면 일단 자국이 생기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원상 복구된다. 그래서 바둑 매니어들은 비자판을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비자나무는 귀하다. 제주도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이젠 국내산 비자나무로 바둑판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예전에 만들어진 비자 판 아니면 중국이나 대만에서 들어온 수입 비자로 만들어진 판이 유통된다. 같은 비자판이라도 값은 색상과 나이테의 무늬, 누가 쓰던 판이고 누구 서명이 있느냐, 얼마나 오래 됐느냐에 따라 천양지차가 있다. 최소 1000만원에서 내력 있는 명품은 수억원에 이른다.

향 좋고 탄력 있는 금빛 비자나무 바둑판이 으뜸

1998년 ‘월간 바둑’에 소개된 경기도 양수리 수종사 동산 스님 소장의 반야심경이 조각된 바둑판. 한국의 바둑판은 예로부터 바둑판 옆면에 그림이나 글자 등을 그려 넣기를 좋아했고 나전칠기로 장식한 바둑판도 있었다. [한국기원 제공]

바둑판만 50년째 만들어온 ‘육형제 바둑’은 ‘한일바둑’과 쌍벽인데 육형제 모두 바둑판 장인이다. 이곳에서도 최고가는 1억원 가격이 매겨진 비자판이다. 육형제 중 다섯째인 신충식(51)씨는 이 “비자판은 나무를 건조시키는 데만 15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국수를 지냈던 프로기사 윤기현 9단이 3년 전 ‘비자판 소송’에서 져 기사생활을 접고 은퇴한 사건은 유명하다. 이 바둑판 2개 중 하나는 조훈현 9단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 9단이 쓰던 것으로 일본 대신들의 서명이 들어있는 명품으로 알려졌다. 다른 하나는 기성 우칭위안 9단의 서명이 들어있는 비자판인데 이를 소장했던 부산의 사업가 김영성씨가 사망한 뒤 미망인과 윤기현씨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벌어졌었다.

둘째로 좋은 바둑판은 계수나무다. 색상은 밤색 계열로 매우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 비자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선 나무를 구하기 힘들다. 계수나무는 수명이 긴 것으로 유명하고 오래 산 나무일수록 바둑판도 좋다는 게 바둑판 장인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은행나무다. 다산 정약용은 “바둑판은 문추(紋楸) 또는 문평(紋枰)이라 한다. 대개 가래나무(楸)와 바둑판나무(枰)로 바둑판을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가래나무는 호두보다 좀 더 딱딱한 가래가 열리는 나무로 소백산 등에서 드물게 서식한다. 바둑판나무는 바로 은행나무를 말한다. 은행나무는 은색 계열인데 추운 지방에서 자란 것이 좀 더 환한 노란색이 느껴진다. 직경이 1m가 돼야 ‘진품’을 만들 수 있고 그런 진품은 10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그렇다면 1960~70년대 전방 군부대에서 숱하게 만들어진 피나무 바둑판은 어느 수준일까. 놀랍게도 “은행나무에 못지않다. 색감도 비슷하다”는 품평이다. 하지만 일선 사단장에서 중대장은 물론 고참 사병까지 바둑판을 챙겨가는 바람에 피나무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생나무를 베어 제대로 건조하지 않고 만든 탓에 바둑판은 다 갈라져 못 쓰게 됐고 지금은 피나무 바둑판을 구경하기 힘들게 됐다.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 즉 오래 산 고목에서 명품이 나옵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암만 잘 건조해도 윗면과 옆면의 색갈이 달라 좋은 판을 만들기 힘듭니다. 명품은 자연이 만드는 것이지요. 자연 건조된 고목을 구했을 때 우리는 보물 캤다고 합니다.”(신충식)

옛 바둑판 중엔 대나무를 덧댄 바둑판도 있었고 오동나무 바둑판도 흔했다. 지금 쓰고 있는 바둑판은 일본식 바둑판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다. 이 바둑판을 뒤집어 보면 반드시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이름이 향혈(向血·사진)이다. 예전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이 바둑 둘 때 훈수꾼의 목을 베어 그 피를 여기에 담았다는 섬뜩한 얘기가 전해온다.

조선 바둑판, 속 텅 비게 만들어 바둑돌 소리 울려

1895년 외국에 최초로 소개한 ‘한국의 놀이’. 조선말 풍속화가 김준근 그림.

조선 바둑판은 옆면이 덮인 상자형이 많다. 옆면을 오동나무 판자로 두르고 속은 텅 비게 만든 다음 철선을 넣어 바둑돌을 놓으면 소리가 울리도록 만들기도 했다. 일본식 승부보다는 ‘풍월’의 냄새가 짙은 바둑판이다. 1998년 ‘월간 바둑’에는 옆면에 반야심경이 조각된 경기도 양수리 수종사 소유의 바둑판이 소개되기도 했다. 바둑서지학자인 안영이씨는 바둑판 위의 화점과 역사의 상관관계를 소개하고 있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때 화점은 연꽃 잎이었는데 조선 조에 들어와 선비를 상징하는 매화가 불교의 연꽃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 지금 바둑판은 그냥 9개의 점이 찍혀 있을 뿐이다. 화점(花點)은 용어로만 남아 있다.

부산 기장 검은돌, 한 해 1000벌씩 나라에 바쳐

바둑돌은 예전엔 냇돌을 갈아 만들거나 바닷가 조개를 깎아 만들었다. 냇돌을 그냥 쓰기도 해 크기가 다양했다. 바둑사가인 이청씨는 조선의 문장가 심노승(1762~1837)의 문집에 실린 부산 기장 바둑돌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다. 기장 대신 기포(碁浦)란 지명도 보인다.

“검은 돌은 기장 고을의 십리포에서 나오고 흰 돌은 동래 수영 포구에서 나온다. 관아에서 부리는 아이들이 어렵게 이 일을 하는데 밥을 싸 들고 가서 돌을 주워 모아 단단한 돌에 간다. 익숙한 아이라도 하루 수십 개밖에 못 만들 정도로 어렵다. 흑백 각각 200알이 한 벌인데 기장 관아에서만 한 해 바치는 돌이 1000벌이다. 관아 아이 20명이 1년 내내 바둑돌을 갈지 않는 날이 없다. 뿔을 갈아 만든 본(本)에 맞춰 흰 돌을 순백의 옥처럼 다듬는다.”

바둑 돌은 소모품인 데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좋은 바둑판, 좋은 바둑돌에 대한 애착이 지극했다. 기장뿐 아니라 전국에서 바둑 돌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의 옛 지도엔 지금은 사라진 기도(碁島)란 섬이 나온다. 한강의 반포대교와 한강대교 사이쯤 자리한 섬인데 이곳 역시 바둑돌을 채취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일본산 조개로 만든 바둑돌 한 알에 45만원 호가

지금 바둑돌은 조개알과 오석으로 만든다. 흰돌은 일본 미카와(三河)산 조개알이 최고였고 이후 휴가(日向)산 조개알이 명품이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품절된 상태다. 이 바둑돌은 가장 비싼 것은 20년 전에 돌 하나에 3만 엔을 호가했다. 조훈현 9단도 휴가산 조개알 한 세트(180개)를 소장하고 있다. 조 9단은 “미카와산 조개알은 세계에 단 네 세트만 남아 있는 문화재급 바둑알이다. 선생님이 쓰다가 김영성씨에게 넘어간 그 돌인데 이게 사라진 게 아쉽다”고 말한다. 일본은 천연 조개가 귀해지자 멕시코산 조개를 수입해 돌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한일바둑판’이 이 돌을 수입해 팔고 있다. 굵기(28~40호)에 따라 30만~95만원의 가격인데 한국기원이 시합용으로 쓰는 것은 35호(64만원)라고 한다. ‘육형제바둑’은 중국 하이난도에서 나는 왕대합을 수입해 바둑돌을 만든다. 큰 것은 1개에 1t이나 나가는 이 왕대합 바둑돌은 부위와 색깔에 따라 60만~100만원 정도다.

검은 돌은 과거엔 규석을 갈아 고온에서 액체로 만든 다음 바둑돌로 찍어냈다. 당연히 값도 싸 백돌 값만 받고 그냥 얹어줬다. 지금은 천연 오석(烏石)으로 만들기에 값이 백 돌과 비슷하다.

바둑 알을 담는 통, 즉 바둑통은 조선시대엔 울릉도에서 나는 큰 갈대뿌리를 높이 쳤다(안영이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 지금은 야구 배트를 만드는 물푸레나무가 가장 많이 쓰이고 고급으로는 뽕나무가 쓰인다. 건강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뽕나무 바둑통은 300만원쯤 나간다. 뽕나무는 잘 자라지 않고 특히 추운 지방에선 더욱 자라지 않는다. 일본엔 뽕나무 바둑판이 실존하는데 바둑판을 만들 정도가 되려면 최소 1000년 이상 자라야 한다고 한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바둑판 사업은 일본이 장악하다시피 했다. 도쿄 외곽의 바둑판 공장에는 1000만~5000만 엔 나가는 비싼 바둑판이 진열돼 있었고 붉은 주단 위에 놓인 ‘가격 없음’이란 표가 붙은 바둑판도 볼 수 있었다. 임자가 나타나기 전엔 가격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역사상 유명한 바둑판은 무엇이 있을까. 그 바둑판들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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