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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16) - 치프 벤더

중앙일보

입력

메이저 리그가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역사적 사실은, 20세기가 후반기를 맞이할 때까지도 존재했던 유색 인종에 대한 배척일 것이다.

1884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서 활약했던 마지스 플리트우드 워커가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떠밀려 리그를 떠난 후, 재키 로빈슨이 등장할 때까지 흑인들은 전혀 메이저 리그와 인연을 맺지 못했고 니그로 리그라는 별도의 조직을 구성해야 했다.

그리고 당시의 빅리그에는 현재의 박찬호나 사사키 가즈히로 같은 동양인 선수도 물론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저 리그 초창기의 역사에 유색 인종의 발자취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몽골계 인종인 아메리칸 인디언의 피를 가진 선수 중, 명예의 전당 멤버인 찰스 '치프' 벤더가 있었기 때문이다.

벤더의 아버지는 독일계 미국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치피와 부족의 피를 가진 인디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순수한 인디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용모는 백인보다는 인디언에 훨씬 가까웠으며, 당시의 백인들에게 그는 어디까지나 '지저분한 유색 인종'이었다.

그러나 벤더는 자신에게 쏟아진 멸시와 조롱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로빈슨처럼 적극적으로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지는 않았고 그럴 만한 상황에 있지도 못했지만, 실력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벤더는 동시대에 활약한 월터 존슨이나 크리스티 매슈슨처럼 화려한 성적표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에디 플랭크와 루브 워들, 프랭크 베이커 등과 함께 최강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핵심 멤버였으며, 한때 월드 시리즈 통산 최다승이라는 영광스러운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인물로, 투수이면서 대타로 기용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포지션 플레이어를 맡기도 했다. 더구나 매우 두뇌 회전이 빨라 상대 타자들이 가장 상대하기를 꺼리는 투수로 꼽혔던 인물이다.

그가 야구계에 남긴 족적에 대해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슬라이더의 개발이다. 그는 직구와 커브의 중간 형태 구질인 슬라이더를 처음으로 시도하고 보급시킨 인물로 꼽힌다. 슬라이더가 보편화된 것은 핼 뉴하우저가 활약한 1940년대 이후이지만, 이 구질의 기원은 벤더에게서 찾을 수 있다.

벤더는 본래 어머니와 함께 인디언 보호 구역에 거주하였으나, 8세가 되던 해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기독교계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5년 뒤에는 같은 주 내의 인디언 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학교에서 야구와 미식 축구에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02년 학교를 졸업한 벤더는 세미 프로 팀에서 활약하게 되었고, 이 팀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당시 필라델피아에 연고지를 두고 있던 애슬레틱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03년 이 팀에 입단하여 빅 리거가 되었고, 이 해에 17승 14패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이듬해인 1904년에 시즌 내내 그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고, 그는 결국 이 해에는 10승에 그쳤다. 그러나 1905년 그는 다시 살아나 18승을 올렸고,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뉴욕 자이언츠와 맞선 월드 시리즈에서,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팀의 유일한 승리를 완봉승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다만 5차전에서는 매슈슨을 내세운 자이언츠에 패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1906년과 1907년에 도합 31승을 거둔 벤더는, 1908년에는 8승을 올리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1909년에 그는 다시 제 기량을 발휘하며 18승을 올렸고, 리그 다승 7위에 랭크되었다. 또한 161개의 삼진을 잡아내어, 이 부문에서 4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1910년 그는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는 이 해에 리그 최고 승률인 .821(23승 5패)를 기록하였으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 해에 애슬레틱스는 다시 월드 시리즈에 올랐고, 벤더는 1차전에서 오벌 오버롤을 내세운 시카고 컵스를 제압하였다. 그는 4차전에서는 패했지만, 결국 이 해에 생애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안았다.

이듬해에 그는 17승 5패를 기록하였으며, 다시 팀을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다. 그리고 시리즈 1차전에서는 패했으나, 4차전에서 매슈슨을 눌렀고 6차전에서 다시 승리를 따내어 시리즈를 끝냈다.

벤더는 1912년에 12승에 그쳤으나 1913년에는 다시 20승 투수 대열에 합류하였고, 팀은 다시 리그를 제패하여 또다시 자이언츠와 대결하게 되었다. 시리즈 1차전에서 벤더는 11안타를 허용했으나 프랭크 베이커의 홈런 등에 힘입어 승리를 따냈고, 4차전에서 다시 팀에 승리를 안겼다.

4차전은 벤더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그가 월드 시리즈 4연승과 통산 6승이라는 기록을 세운 경기이기 때문이다. 이후 뉴욕 양키스의 레드 러핑이 이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벤더는 월드 시리즈 통산 최다승 투수로 남아 있었다. 결국 애슬레틱스는 4승 1패로 또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1914년 벤더는 17승으로 리그 다승 7위에 올랐으며, 그의 승률(.850)은 리그 최고였다. 이 해에도 애슬레틱스는 여전히 리그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벤더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포수 행크 가우디의 맹타를 막지 못하였고, 결국 팀은 7대 1로 패했다. 그리고 애슬레틱스는 이 시리즈에서 충격적인 4전 전패를 당하였고, 이후 스타들을 점차 내보내어 약체로 전락하였다.

1915년을 앞두고, 벤더는 스스로 제3의 빅 리그임을 선언하여 1913년부터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페더럴 리그로 옮겼다. 그러나 이 해에 볼티모어에서 그는 3.99의 방어율과 4승 16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페더럴 리그는 기존 메이저 리그에 백기를 들고 와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벤더는 1916년부터 내셔널 리그의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새 팀에서 2년 동안 15승을 거두었으며, 1917년을 끝으로 빅 리그를 떠났다. 이후 그는 마이너 리그에서 선수와 감독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학 팀에서 코치를 맡기도 했다.

1925년,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코치를 맡고 있던 벤더는 팀의 투수진을 아끼는 차원에서 보스턴 레드 삭스를 상대로 홈에서 등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준 뒤, 다음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그는 1953년에 원로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이듬해 사망하였다.

찰스 앨버트 벤더(Charles Albert "Chief" Bender)

- 1883년 5월 5일 미네소타 주 브레이너드에서 출생
- 1954년 5월 22일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사망
- 우투우타
- 1903 ~ 1914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 1916 ~ 1917년 필라델피라 필리스
- 1925 시카고 화이트 삭스
- 통산 성적 : 212승 127패, 방어율 2.46, 1711탈삼진
- 명예의 전당 헌액 : 1953년(By Veterans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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