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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기 대명사 제록스의 위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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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록스'라는 말을 '복사'라는 의미로 알아듣고 전달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을 정도로 미국의 복사기 제조업체 제록스는 복사기 시장의 제왕이었다.

그 제록스가 최근 파산설을 부인하는데 안간 힘을 쓸 정도로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 이 회사는 또 벤처 자본가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팔로 알토 연구소를 팔아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팔로 알토 연구소는 지난 70년대 개인컴퓨터 관련 기술의 연구로 명성을 날렸던 곳이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제록스는 매출과 주가는 급락하고 경쟁업체들에게 시장을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 자금조달을 위해 이 회사 사업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복사기와 프린터 사업까지도 매각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라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코네티컷주 스탬포드에 본사가 있는 이 회사는 자산매각에 대해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코닥이나 폴라로이드, 렉스마르크, 피트니 바우스처럼 이미지 사업 부문에서 제록스와 함께 뛰고 있는 경쟁업체들도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은 소니의 공격적인 디지털 카메라 판매, 휴렛 패커드의 프린터 시장 장악 등에 눌려 함께 고전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제록스다.

지난주 제록스가 법원에 재산보전신청을 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때 이 회사는 부랴부랴 70억달러 규모의 신용이 있다고 밝혔으나 분석가들은 그중 40억달러는 이미 단기채무 상환을 위해 소진한 상황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와중에 지난해 5월 주당 64달러까지 올라갔던 주가는 지난 18일 10년만에 가장 낮은 6.75달러로 내려갔다. 이 바람에 일부 주주들이 경영진을 완전히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제록스가 일본내 계열사 후지 제록스의 절반 가량은 팔아야 할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분석가들은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주력사업인 복사.프린터사업은 매각하고 솔루션사업 전문업체로만 완전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록스가 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는가.

수십년간 복사기 시장에서 제록스의 아성은 대단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프린터와 복사기의 상품으로서의 영역구분이 모호해지고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간편하게 쓸 수 있는 값싼 복사기나 프린터가 공급되면서 판도는 완전히 틀려졌다.

현재 소규모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쓰는 프린터나 복사기 시장은 휴렛 패커드가 장악하고 있다. 제록스가 그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제록스는 한때 첨단 문서기술 네트워크 복사기 시장에서 선두주자였으나 독일의 하이델베르케 드뤽마시넨, 일본의 캐논, IBM에 공략당하고 있다. 이같은 시장의 잠식은 애프터서비스 시장, 부품시장의 위축을 초래했다.

이 와중에 제록스는 97년 IBM 출신의 리처드 토만 회장을 영입, 회생방안을 모색했으나 지난 5월 결국 제록스 전 최고경영자 폴 얼레어가 회장으로 복귀했으며 이같은 내부의 혼란을 틈타 리코 같은 경쟁회사들은 복사기 시장을 공격적으로 파고 들어 14% 이상으로 점유율을 높이기도 했다.

기존 제록스 고객들도 제록스측의 불성실한 태도, 오만함, 고자세의 가격협상태도 등에 불만을 제기하며 하나씩 떠나고 있다.

한편 제록스는 오는 24일 3.4분기 경영실적을 발표하면서 향후 경영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뉴욕=연합뉴스) 강일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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