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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59) 마오쩌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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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치(왼쪽 첫째)가 1961년 7월 11일 ‘중조우호 합작 호조조약’ 서명 후 덩샤오핑(둘째)·리푸춘(넷째)·저우언라이(여섯째)를 대동한 채 김일성과 환담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자본가들에게 착취유공론(搾取有功論)을 편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를 톈진시장 황징(黃敬·황경, 현 상하이서기 위정성의 부친. 마오쩌둥 부인 장칭의 첫 번째 남편. 본명은 위치웨이)이 치스린(起士林)으로 안내했다. 치스린은 1901년 독일인이 세운 당대 최고의 양식집이었다.

류샤오치는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민생을 위한 공상업은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며 착취유공론을 계속했다. “한때 많은 농민들이 동북으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에 가야 대지주들에게 적당히 착취당하며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석했던 사회주의 경제학자 첸자쥐(千家駒·천가구)가 반론을 제기했다. “지금 중국에는 불필요한 산업이 많다. 한 예로 화장품 공업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 앞으로 여성 동지들은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 화장할 필요가 없다.” 류샤오치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여성들이 화장을 안 하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화장품 공업 발전 여부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인민들이 필요로 하면 저절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1975년 첸자쥐는 회고록을 펴내며 26년 전 톈진에서 류샤오치와 함께했던 몇 시간을 회상했다. “당시 류샤오치는 중공의 2인자이며 당내 최고 이론가였다. 자본가들과의 대화와 치스린에서의 점심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발언을 들으며 내가 얼마나 유치했던가를 깨달았다. 나야말로 좌파들이 걸리기 쉬운 좌경유치병(左傾幼稚病) 환자였다. 얼마 후 상하이에 갔다. 가는 곳마다 착취유공론을 선전하고 다녔다.”

류샤오치의 톈진 강화는 효과가 있었다. 국민당 세력권인 양자강 이남이나 홍콩으로 이주했던 자본가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류샤오치의 자본가 옹호는 마오쩌둥의 연합정부론에 근거한 경제정책이었지만 수십 년간 풍파가 그치지 않았다. 발단은 마오쩌둥이었다. 류샤오치의 주장이 정책(政策)적이었다면 마오쩌둥의 주장은 책략적 성격이 강했다. 류샤오치는 이 점을 간과했다.

마오쩌둥은 옆에서 장단 맞추기가 힘든 지도자였다. 말과 생각이 틀리고, 어제와 오늘이 다를 때가 많았다. 류샤오치의 톈진 강화를 계기로 시장이 안정되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톈진 강화 직후 톈진시 서기 황커청(黃克誠·황극성)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뭐냐.” 경제건설이라고 하자 마오쩌둥은 고개를 휘저었다. “틀렸다. 계급투쟁이다. 자산계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황커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오쩌둥은 말로는 자본가들에게 관용과 단결을 강조했지만 내심 자본가들에게 경계를 느슨히 한 적이 없었다.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자산계급에 대한 지나친 표현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류샤오치는 툭하면 검토 대상이 됐다. 편들어 주는 사람은 덩샤오핑 정도가 유일했다.

동북의 당·정·군 대권을 장악하고 중앙정부 부주석과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까지 겸하고 있던 가오강(高崗·고강)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오의 첫 번째 후계자였다. 가는 곳마다 류샤오치를 대놓고 비판했다.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미숙하다. 백구(白區·국민당 점령 지역)에서 지하공작만 하다 보니 군사 방면이나 근거지 건설 경험이 없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에는 “스탈린은 류샤오치를 싫어한다. 저우언라이도 신통치 않게 본다. 나를 제일 좋아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가오강은 덩샤오핑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류샤오치를 몰락시키고자 작정을 했다. 덩샤오핑이 마오에게 달려가 일러바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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