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기 파괴 욕망, 그 절망의 늪으로

중앙일보

입력

Joins 오현아 기자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맨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 일일까. 발가벗은 채 항문에 오이를 쑤셔 박고 죽은 친구와 자살한 누이동생의 환영이 머리를 떠나지 않을 때 그 불안함이란, 그 참혹함이란.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한 상황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풀어나간다. 주인공들은 현실의 공포에 맞서 죽음보다 더 지독한 불안감을 맛보지만 끝내 희망의 단초를 놓지 않는다.

〈만연원년의 풋볼〉(박유하 옮김, 고려원 펴냄)은 노벨상을 받을 당시 '오에 겐자부로 전집 7권'으로 국내 소개됐으나 절판돼 이번에 새로 나온 작품. 백년 전의 만연원년 농민 봉기와 작은 산골짜기에서 일어나는 폭동을 대비시켜 인간 본연의 폭력성, 자기 파괴 욕망, 폭력에 전염되는 군중 심리 등을 보여준다.

주인공 미쓰는 새벽녘 집 앞 정화조용 구덩이에 몸을 파묻고 죽음의 냄새를 온 몸으로 빨아들인다. 얼굴을 온통 시뻘건 페인트로 칠한 채 목 매달아 죽은 친구, 표정 없는 눈으로 그저 누워 있기만 하는 백치 아기, 맨정신으로 살기를 포기한 듯 손에서 위스키 병을 놓지 않는 아내. 미쓰는 죽은 것보다 더 철저히 단절된 느낌으로 스스로를 가학하면서 자기 안으로 서서히 침몰해 들어간다.

그의 실명한 오른쪽 눈이 응시하는 자기 내부의 어둠보다 현실은 더욱 암흑에 둘러싸여 있다. 어느 날 소식이 끊겼던 동생 다카시가 미국에서 귀국한 뒤 미쓰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한다. 어릴 적 뛰놀던 산골짜기에서 잃어버린 뿌리를 되찾을 수도, '풀의 집'이 그들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고.

다카시는 만연원년인 1860년에 농민 봉기를 일으킨 증조부의 동생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청년들을 모아 풋볼팀을 만든다. 골짜기의 경제를 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조선인 '슈퍼마켓 천황'에 대항하기 위함이다.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의 달콤한 기억'을 되살린 마을 사람들이 슈퍼마켓을 습격해도 미쓰에게는 관심밖이다. 내릴 뿌리마저 찾지 못한 그는 골짜기에서도 이방인에 불과하다. 다만 자기 파괴 욕망에 불타는 다카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만이 그의 의식을 관통한다. 아이들까지 폭동에 참여하는 달뜬 분위기는 그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무저항 상태의 나이 어린 젊은이의 얼굴을 언제까지고 때리고 있는 다카시는 이미 '자원한 부랑아'의 영역을 넘어섰고, 전율스런 포악함과 그 집요함은 모두 범죄자의 소질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다카시에게서 발견한 폭력 범죄자의 빛은…"(이 책 294쪽에서)

폭동의 모든 악을 뒤집어쓰기로 자청한 듯 다카시는 형수와 관계를 맺기도 하고 처녀를 강간하려다 살해하기도 하는 등 자신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간다. '가공의 범죄를 소유하기 위한 편집광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사형대로 내몰려고 한다.

자살한 친구처럼 다카시는 행위로서 진실을 말하려 한 것일까. 평생 자신을 저주하게 한 과거의 진실을 형에게 털어놓고 그는 방아쇠를 당긴다. 미쓰는 거짓 자기 포기라고 다카시를 비난하지만 동생이 자살한 뒤 그가 자신의 지옥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살하면서 '진실'을 외친 것이라고.

오에 겐자부로는 작은 골짜기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의 모든 문제를 지적한다. 뿌리 잃고 표류하는 현대인, 민간 경제를 피폐하게 만드는 거대 자본, 조선인과의 민족 갈등,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 보수와 진보의 대립….

오에의 작품은 다양한 알레고리와 신화의 세계를 넘나드는 복잡한 구조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난해한 문체를 그대로 반영한 듯 한 번 읽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번역문을 끝까지 읽어낸다면 그의 원숙한 세계를 접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