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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칫돈 불법유출 실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해외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관세청이 올 1~7월 적발한 불법 외화 밀반출을 원화로 환산하면 1조2천8백7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중 무역을 가장한 밀반출도 급증해 올 상반기 적발 액수가 5천4백25억원으로 이미 지난해 규모(4천6백73억원)를 넘어섰다.

관세청 관계자는 "국제수사 공조가 잘 안되는 데다 조사인력이 달려 현지조사는 어렵다" 며 "무역이나 해외 직접투자 용도로 나간 외화가 실제 어디에 쓰였는지 검증하기 힘들다" 고 말했다.

문제는 관세청에도 걸리지 않는 불법자금 유출이 엄청나다는 데 있다.

각종 한도 규정이 있긴 하지만 은행창구에서 명의를 분산하거나 일부 악덕 환전소나 이주대행 업체를 통하면 얼마든지 수십만달러를 해외로 보낼 수 있다.

원화를 미 달러화로 바꿔 예금해두려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은행 외화예금 잔고는 지난 9월말 현재 1백16억달러로 지난해 말보다 두배 가까이로 늘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외화예금이 는다는 것은 그만큼 원화 자산에 대해 불안해 한다는 의미" 라고 말했다.

◇ 관행화된 분산 송금= "2만달러만 미국에 송금해주세요. " 50대 남녀 3명이 지난 10일 서울 강남의 한 시중은행 외환창구에 나타났다.

신분증 4개와 미국 수취계좌 3개를 내밀며 송금을 요청했다. 돈은 전주(錢主)로 보이는 남자가 내놨다.

은행 직원은 잠시 살펴보다가 그대로 송금했다. 이른바 차명을 이용한 불법 '분산송금' . 개인은 한번에 5천달러 이상 보낼 수 없고, 송금 누계가 연간 1만달러를 넘으면 국세청에 통보된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서다.

한 시중은행 외환 담당자 A씨는 "한도를 넘기지 않기 위한 소규모 분산 송금은 관행화돼 있어 창구에서 별 문제삼지 않는다" 며 "국세청에 통보하면 여러가지로 귀찮아진다는 생각에 안면있는 고객에겐 우리가 먼저 명의를 분산하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고 말했다.

다른 은행 B씨는 "최근 들어 다른 금융기관에서 방금 보낸 송금확인서를 내밀며 똑같이 처리해달라는 고객이 늘었다" 며 "보내는 은행과 명의를 분산하고, 수취인 계좌를 여러개로 나누면 5만달러 정도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 말했다.

◇ 일부 환전소.이주대행 업체가 불법 통로

- 송금때문에 왔는데요…. (기자)
"급한 돈인가요? 얼마나 됩니까?" (사장)

- 10만달러 정도 되는데…. (기자)
"그 정도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달러당 30원씩 쳐서 수수료는 3백만원 듭니다. " (사장)

- 그렇게 많이 듭니까?(기자)
"빨리 보내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그려가며)홍콩으로 보내면 그곳에서 미국 갈 돈에 묻어 보냅니다. " (사장)

지난 6일 오전 서울 중심부의 한 상가건물 '○○○환전소' 에서 손님을 가장한 기자가 겪은 일이다.

기자가 "수수료를 낮춰달라" 고 하자 이 사장은 "그렇게 하려면 미국에서 국내로 돈을 보내려는 사람과 맞교환해야 한다" 며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 는 부탁도 했다.

일부 악덕 환전소가 무역을 가장한 송금.분산 송금.환치기 등 불법 송금을 대행해주고 있다. 한국은행에 등록된 환전소는 현재 1천1백30개. 숫자도 많고 송금 편의를 돕는데 정책이 맞춰져 있다 보니 사실상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일부이지만 이주대행 업체들도 불법 송금에 가세한다. 방식은 동포들의 해외이주비 한도에 끼워넣는 한도 전용(轉用). 한 업체 관계자는 "10만달러를 넘는 금액은 분산송금으로 보내기 번거로워 이 방식이 활용된다" 며 "인근 환전소들이 손님을 넘겨주기도 한다" 고 말했다.

◇ 무르익는 반출 준비=외환거래의 갖가지 빗장이 풀릴 내년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 자금도 많다.

4년 전 캐나다로 이민 간 崔모(41)씨는 국내에 남겨놓은 20억원 규모 재산에 대한 자금출처 증빙서류를 마련했다.

내년 1월 이주비 한도가 풀리는대로 갖고 나가기 위해서다. 지금은 3인 가족 투자이민 한도가 1백30만달러밖에 안돼 다 가져가지 못했던 것. 하나은행 한곳에만 약 8백억원의 동포자금이 잠겨 있다.

동포자산 관리를 맡는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동포나 해외 체재자들이 국내에 남겨놓은 돈은 금융권 전체로 1조원은 될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일부 '큰손' 들도 출처 증명이 어려운 재산 반출을 준비 중이다. H은행 이주담당자 朴모 대리는 "내년 외환자유화 이후에 당국이 자금출처 조사를 할 것인지, 차명계좌로 관리해온 돈을 정말 빼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가 많다" 고 말했다.

해외 부동산 구입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다. 부동산 컨설팅업계엔 지난 여름부터 해외 부동산 구입 문의가 급증했다.

부동산 컨설팅업체인 센추리21은 현재 미국과 호주 지역의 부동산 취득 상담을 10여건 진행 중이다. 유학생과 해외 주재원 거주 용도 외에 투자목적으로 해외에 집을 사두려는 이들도 있다. 대개 30만~50만달러는 내겠다는 재력가들이다.

이 회사 권오진 사장은 "조기유학이 급증하는 등 실수요가 많은 만큼 상당한 자금이 부동산을 사기 위해 해외로 나갈 것" 이라고 전망했다.

기획취재팀=고현곤.이상렬.조민근 기자
제보=02-751-5216, 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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