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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연인] 김기덕 감독의 '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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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연인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그 연인들은 철저하게 삶의 양지 쪽의 따사로움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름도 없으니 그냥 여자, 혹은 남자라고 지칭할 수밖에.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는 두 사람. 웃지도 않는다.

서로에게 다정하지도 않다. 다정이라니. 서로 파멸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양 보인다.

안개에 싸인 호수는 측량할 길 없는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이다.아름다운 것 같지만 투명하지 않고 평화로운 것 같지만 스산한 호수. 물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부드럽게 출렁이지만 그 물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온갖 속물 근성을 적나라하게 내보여준다.

여자는 보트를 저어 이 물 위의 색색의 낚시집을 오가며 커피며 낚시재료, 때때로 자신의 몸도 팔아가며 홀로 살아가고 있다.

사랑 따위는 오래 전에 잊어버린 것 같은 여자. 이 물 위의 낚시집에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난 아내를 살해한 섬약한 남자가 숨어든다.

남자가 두려움에 떨며 우는 모습을 엿본 여자의 내면이 흔들린다.아내를 살해한 그의 손은 구부려지는 것이면 무엇으로든 형상을 빚어낼 줄 아는 조각가의 손이기도 하다.

이 위험한 두 남녀를 품은 채 물 위의 노랑.초록.보라색의 낚시집은 밤이나 낮이나 삐걱대며 떠 있다.

만나선 안 될 사람들이 만나 서로 가엾이 여기게 됐을 때, 그 연민이 남녀 관계로 진전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최후의 선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삶을 옭아맨다.서로 목숨을 담보해 놓은 것과 같다.

함께 죽거나 함께 사는 것이다.서로 낚시바늘에 걸린 상처투성이의 물고기가 돼 마지막으로 파닥여보는 것이다.

경찰을 보고 공포에 질려 낚시바늘을 삼킨 남자를 여자가 구해내고, 떠나려는 남자를 붙잡으려고 낚시바늘을 자궁에 집어넣고 죽으려는 여자를 남자가 구해낸다.

상대의 상처에 대고 부채질을 해주는 것, 이것만이 영화 속 연인들이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아니냐라는 의문이 부질없을 만큼 이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설득력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든 다른 사람을 살인하는 일도, 수장시키는 일도.기이함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간혹 비명을 질러가며 외면하다가 다시 빨려들듯이 응시하게 되는 것은 인생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인간들의 불안한 이상심리를 섬뜩하게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엽기를 심리적으로 치밀하게 파고든 한국 영화가 있었을까. 복선과 상징이 적절하게 잘 배치되어 있어 '뭐야□' 하는 마음이 수그러들고 없다.

이 같은 감독의 예사롭지 않은 역량 덕분에 비틀린 관계 속의 이 연인들에게 신경을 긁히면서도 시종 그들을 주시하게 된다.

이 불안한 사랑의 처절함을 통과하는 일은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고독하고 외로운 인간을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의 인물이 아니다.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다.여자에겐 남자가 살인자라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물론 남자에게도 여자가 더 이상 꿈꿀 인생이 없다는 게 다행이다.서로의 결핍이 서로를 묶어주기에.

최후의 시간, 남자는 물 위에 홀로 떠 있는 수풀 속으로 들어간다.최후의 시간, 여자는 물이 넘실거리는 보트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다.

여자는 죽은 것일까? 보트 위에 넘실거리는 물은 양수인 셈이다.가만 보니 물 속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여자의 자궁모양이 남자가 숨어 들어간 수풀 모양과 똑같다.

그러니까 남자는 자신이 처음 나온 곳으로 회귀한 것이다.여자는 남자를 그곳에 숨기고서 다시 태어나는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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