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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시켜주실 건데요?" 이성남 '당돌 면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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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999년 1월 출범한 금융감독원에서 이성남(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검사총괄실장의 발탁은 ‘인사의 꽃’으로 불렸다. 무소불위의 금감원 핵심 요직에 여성을 앉혔다며 청와대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이성남은 금감원 부원장보를 거쳐 첫 여성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이 된다. 사진은 2004년 4월 22일 임명 뒤 처음 열린 금통위 회의에 밝은 표정으로 들어서는 이성남 위원과 이덕훈·강문수 위원(오른쪽부터). [중앙포토]

통합 금융감독원 국·팀장급 인사의 꽃은 이성남이었다. 지금 민주당 국회의원인 그 이성남이다. 그를 검사총괄실장으로 발탁하자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럴 만도 했다. 금융 관련 요직은 모두 남성이 독식하던 때였다. 금감원은 구조조정을 지휘하던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검사 업무가 50대 초반 여성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성남은 씨티은행 출신이다. 그를 추천한 건 정운찬 당시 서울대 교수였다. “믿어볼 만하다”고 했다. 은행을 퇴사하고 여행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사를 한 달 남짓 앞두고 그를 사무실로 불렀다. 면접을 보기 위해서였다.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은 이성남이 들어왔다. 지금처럼 발랄한 모습이었다.

 “검사 업무 공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뜸 물었다.

 “못 믿겠으면 안 시키면 될 거 아니에요.”

 그는 당돌하게 쏘아붙였다.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면접보러 온 사람 특유의 조바심이 전혀 없었다.

 “그럼 어떤 업무를 맡고 싶습니까.”

 “뭐 시켜주실 건데요?” 계속 당돌한 말투다.

 “차장 정도 맡으면….”

 “안 할래요.” 그는 말을 잘랐다. 자리에서 일어설 기세였다.

 “그럼 뭘 하면 되겠습니까.” “정 교수는 부원장보 정도는 줄 거라고 하던데요.” 부원장보는 청와대 입김까지 불던 고위직이다.

 “그건 좀 어렵고…. 검사 총괄하는 자리면 어떻겠습니까.”

 “…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렇게 이성남이 발탁됐다. 가벼운 자리가 아닌데 생색도 못 내봤다. 사실 감독·검사 업무엔 여성을 뽑으려고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다. “검사 업무를 맡을 여성을 알아봐 달라”고 여러 군데 얘기해 뒀다. 감독·검사 업무는 여성들 적성에 맞다고 봤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틀린 점이 없는지 꼼꼼히 대조해 봐야 하는 업무다. 남자들은 학연이다 지연이다 걸리적거리는 게 많았다. 이성남 외에도 외국은행 검사팀장에 씨티은행 출신 최명희를 영입했다.

 이성남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검사 업무의 절차를 꿰뚫고 있었다. 내가 마음먹었던 ‘검사 자료 공용화 작업’을 지휘하기에 적임이었다. 그때까지 검사 직원들은 검사 결과를 각자의 노트에 적어가지고 다녔다. 필요한 내용만 보고서에 쓰고, 나머지는 폐기했다. 새 직원이 오면 업무가 이어지지 않았다. 검사받는 회사가 사정하면 요령껏 결과를 수정할 수도 있었다. 나는 검사 업무를 모두 컴퓨터에 기록하게끔 하려 했다. 이런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작업에 이성남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파격 발탁 소식에 가장 신이 났던 건 이희호 여사였다. 이 인사를 “김대중 대통령의 여성 우대 정책의 표상”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이성남이 자신의 모교인 이화여대를 나온 것도 흐뭇했을 것이다. 발령일에 이성남 자리로 작은 난이 하나 왔다. 리본엔 딱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이 희 호. 국장급 인사에 대통령 부인이 난을 보낸 것이었다. “주변 화분들은 다 빛을 잃는구나.” 직원들이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 인사에서 나는 두 가지에 방점을 찍었다. 우선 윗자리를 확 줄였다. 금감원은 가분수 조직이었다. 윗자리가 너무 많았다. 모든 이에게 자리를 주려고 1급과 2급을 나누고 있었다. 보직이 없는 이들까지 ‘무보직 1급’이라는 직급을 받고 있었다. 나는 직급과 직위를 통합했다. 자리가 없는 이들은 직급도 없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온 나라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진두지휘하는 금감원만 구조조정의 예외가 될 순 없었다.

 다음으로 은행·보험·증권 하는 식으로 권역별로 나뉘었던 조직을 소비자 보호, 검사, 규제 감독, 회계 감독 하는 식으로 기능별로 쪼갰다. 직원들에게 자기 구역이 생기면 그 구역에 동화될 수 있다. 그쪽의 논리에 젖어들고 자신의 조치를 합리화하게 된다.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멀쩡한 직장을, 그것도 안정성은 최고라고 자부하던 직장을 한순간에 잃는 이들이 속출한다. 기존의 일도 뿌리째 뒤바뀐다. 내부 불만이 터지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내부를 총괄할 부원장은 주의 깊게 골랐다. 도덕성이 철두철미해야 했다. “이 사람이면 누군 봐주고 누군 안 봐준다”는 말이 안 나오는 이라야 했다.

 그 기준에서 꼽은 이가 이정재다. 나중에 금감위원장을 지낸 그는 소문난 딸깍발이다. 그라면 무슨 일을 하든 “뒤에 꼼수가 있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우선 욕심이 없었다. 한국은행에 다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행정고시에 합격해 놓고 “공무원 안 하겠다”고 계속 한국은행에 남았다. 내가 별정직으로 데려다 재무부에서 함께 일하며 공무원이 됐다. 결벽증처럼 보일 정도로 맺고 끊는 게 철저했다. 오해를 살까 봐 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정도였다.

 예금보험공사 전무를 지내던 그에게 부원장직을 제안했더니 “절대 안 한다”고 말을 잘랐다. “언제고 그만둬도 된다. 처음에 어려운 것만 좀 도와다오.” 사정을 해서 데려왔다. 들어와서도 툭 하면 “안 하겠다”고 내던지곤 했다. 달래가면서 일하느라 고생했다.

 또 한 명의 딸깍발이는 강병호 부원장이었다. 한국은행 출신. “이정재보다 덜 고지식하다”고 하면 섭섭해할 사람이다. 그 역시 구내식당파다. 종일 책 아니면 보고서만 들여다봤다. 짬이 나면 자기가 쓴 『금융시장론』 『금융기관론』을 붙잡고 고칠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놓고 앉아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이들은 금감원의 중심을 잡아줬다. 험한 구조조정 업무를 하던 금감원이었다. 진정성과 투명성을 의심받고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금감원은 청탁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정재와 강병호를 통해 알리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었다.

 당찬 이성남이건, 고지식한 이정재·강병호건 공통점은 하나였다. 그들은 전문가였다. 그뿐이랴. 갓 마흔을 넘긴 나이에 부원장보로 발탁했던 보험 담당 김기홍, “부원장 아니면 안 한다”는 걸 달래 앉혔던 국제 총괄 부원장보 오갑수, 모두 프로 중 프로였다. 1999년. 그해의 금감원은 강했다.

등장인물

▶이정재(66)

한국은행에 다니던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했지만 “공무원 안 하겠다”며 한국은행에 남았다. 내가 재무부 국장이던 70년대 말 별정직 공무원으로 재무부에 들어왔다. 99년 예금보험공사 전무이던 그를 세 번 요청 끝에 금융감독원 부원장으로 불러온다. 정운찬 전 총리 못지않은 야구광이다. 이후 재정경제부 차관, 제4대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

※바로잡습니다※

2월 24일자 E2면 ‘위기를 쏘다’의 이성남 의원 남편 관련 내용 중 ‘신용불량자’는 사실과 다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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