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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다블뤼 주교 “조선인은 아이 안 버려 … 유럽인 창피한 줄 알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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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세기 초중반 조선에서 활동했던 프랑스 신부들. 조선을 다녀간 여러 부류의 외국인이 있지만 프랑스 신부들은 그 중에서도 각별하다. 상인이나 여행가, 군인, 외교관처럼 잠시 머문 것이 아니라 길게는 20년 넘게 아예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이 프랑스의 선교 본부나 가족에게 쓴 편지들은 조선의 풍속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김수진 책임기획, 글항아리
432쪽, 2만3800원

중국과 일본 사이 ‘조용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여겨지던 조선. 하지만 신간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을 보면 의외로 조선을 들락날락한 외국인이 적지 않다.

 중국과 일본 사신(使臣)의 공식 행차는 말할 것도 없고 임진왜란 같은 전쟁, 네덜란드인 하멜로 대표되는 표류, 프랑스 신부들의 천주교 전파, 미국 작가 잭 런던의 러·일전쟁 취재, 스웨덴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의 한반도 야생 동물 조사 등에 대한 기록을 쭉 따라가다 보면 ‘조용한 나라’라는 조선의 별명은 좀 수정돼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조선 땅에 들어와 조선을 만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조선 초부터 일본 식민지시기까지가 대상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지난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연 대중강좌를 새롭게 편집했다.

스웨덴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이 한국탐험 경험을 담아 1938년 펴낸 『한국의 야생동물지』에 실린 표범 사냥 장면. [글항아리 제공]

 푸른 눈 서양 이방인들의 기록이 흥미롭다. 특히 프랑스 선교사와 미국 작가 잭 런던의 시각이 대비된다. 19세기 초·중반 천주교가 금지된 조선에 몰래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은 길게는 20년 넘게 조선에 살았다. 상인·여행가·군인·외교관처럼 잠깐 다녀가는 것이 아니었다. 아예 터를 잡고 살며 파리 본부나 고향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조선의 풍속과 제도가 전해진 창구였다. 그들 눈에 조선 임금은 게을러 보였고 양반 지배층은 일반 백성에게 가혹했다. 산업문명이 앞선 서양의 시각으로 조선을 미개하다고 폄하하는 대목은 선교사라고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건 조선인의 가족 사랑을 주목했다는 점이다.

 다블뤼(1818~66) 주교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조선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가난하다고 자녀들을 내버리는 유럽 사람들은 창피해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자선 행위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적어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습니다”라며 조선인의 공동체정신에 대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잭 런던은 『강철 군화』 『별 방랑자』등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작가다. 그가 조선에 온 것은 러·일전쟁 시기인 1904년 2월. 미국의 ‘허스트’ ‘뉴욕 헤럴드’ ‘콜리어스’ ‘이그재미너’ 등 신문·잡지 연합특파원으로 파견돼 왔다.

 4개월 채 안되게 조선에 머물렀던 런던의 평가는 혹독하다. 한국인이 비능률적이고 무능력하다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백인 여행자가 처음 한국을 체류할 경우, 그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강력한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는 한국인을 죽이고 싶은 욕구이고, 또 하나는 자살하고 싶은 욕구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첫 번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런던은 나약하고 게으르며 도둑질 잘한다는 식으로 조선인의 품성을 비하하면서, 일본군에 대해선 질서·규율·효율성이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급진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으면서도 약소 민족에 대한 연민은 없고 오히려 강자의 경멸 어린 시선만 내보이는 그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런던은 당시 작품이 가장 많이 외국어로 번역된 미국 작가로 손꼽힌다.

 조선 정부가 채용한 최초의 서양인인 뮐렌도르프를 통해 19세기 유럽의 동양학 열풍 배경을 소개한 점도 눈길을 끈다. 동양은 서구 엘리트들에게 새로운 일자리와 명예·출세를 보장하는 기회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1902년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로 8개월간 근무한 카를로 로제티의 저서 『꼬레아 꼬레아니』는 당시 대한제국이 단지 ‘망해가는 나라’가 아니라 동양 전통과 서구 문화를 나름대로 조화시키면서 근대화를 모색하는 나라였음을 증언하는 주요 자료로 평가받는다.

 조선을 가장 많이 다녀간 외국인은 중국 사신이었다. 많은 경우 조선 출장이 한 밑천 잡는 기회였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세종 때인 1492년 명나라 칙사 윤봉이 귀환하며 200궤짝 분량을 챙겨갔다고 한다. 궤짝 1개에 인부 8명이 필요했다니 규모의 어마어마함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사신들에게 조선은 은이 넘쳐나는 일종의 ‘엘도라도’였다는 것이다. 명나라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188회, 청나라는 245회 정도로 추산된다.

 임진왜란때 군의관으로 종군한 일본 승려 케이넨(慶念·1533-1611)은 『일일기(日日記)』를 통해 전쟁의 참혹상을 전했다. “여기 전주를 떠나가면서 가는 도중의 벽촌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죽이는 참상은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적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옛 조선과 오늘의 우리가 얼마나 같고 또 달라졌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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