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줄세우기 공천 … 입 닫은 온건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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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당선 가능성’보다는 ‘정체성(正體性)’. 민주통합당의 4·11 총선 후보자 공천심사 기준이다. 강철규 공천심사위원장은 9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이 같은 입장을 공식 확인했다. 그는 “정체성이 공천 기준”이라며 “(후보자 평가에서) 당선 가능성 비중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누가 진짜 경제·사회민주화 세력이고 가짜인지를 평가하겠다”고 강조했다.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대변할 수 있는, 사실상 당의 ‘좌(左) 클릭’ 노선에 부합하는 후보들을 공천키로 한 것이다. 당 안팎에선 정체성 평가항목 ‘1순위’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질 거란 관측이 돌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이미 ‘살생부’까지 돌고 있어 분위기가 흉흉하다. 김성곤 의원을 비롯해 FTA 협상파였던 김진표 원내대표, 노영민 원내수석부대표, 강봉균·김동철 의원 등의 이름이 올라 있다. 야권 지지 성향의 네티즌들은 트윗 등을 통해 “이들을 낙천시키지 않으면 지지를 철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공심위원장이 나서 정체성을 강조하고, 트위터에서 살생부까지 도는 바람에 중도파 의원들은 장막 뒤로 숨고 있다. 한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왜 자꾸 나한테 FTA에 대해 묻는 거냐”며 말을 잘랐고, 호남 지역의 한 의원도 “괜한 구설에 오르기 싫다”며 입을 닫았다.

 지난해 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의 한·미 FTA 합의 처리 협상에 나섰던 온건 협상파의 대표 격인 김성곤 의원이 8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전달식 행사에서 목격된 것도 이런 당 기류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공천을 앞둔 때인 만큼 이들 온건파는 속앓이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자 이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공천 걱정’을 덜게 된 박상천 고문이 물러나면서 민주통합당에 쓴소리를 했다. 그는 공심위의 이 같은 심사 원칙에 대해 “당과 생각을 달리한다고 (공천 등에)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며 “당내에서도 ‘언론의 자유’는 중요한 가치”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러면서 박 고문은 “선거 는 중도 성향 유권자의 향배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중도진보주의자를 포함해 진보의 변주를 넓게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략통’으로 통하는 한 중진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새누리당이 복지노선을 강화하는 등 점점 중원(中原)으로 치고 오는데 당이 왼쪽으로만 밀려가서야 되겠느냐”며 “총선 전망이 조금 밝아지자 다들 ‘낭만파’가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당내 논란이 거세지자 백원우 공심위 간사는 브리핑을 하고 “마치 후보 경쟁력은 도외시하고 정체성만 따지는 걸로 오해하는 것 같다”며 “그래도 후보 경쟁력 배점이 전체적으로 제일 높을 것”이라고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양원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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