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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종의 미술 투자] 스스로 고립되는 용기…남경민의 예술혼을 주목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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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남경민의 ‘베르메르에 의한 환영’

설악의 토왕폭 빙벽은 높이만 360m에 이른다. 토왕폭은 1977년 크로니 산악회 박영배·손병민의 13박14일에 걸친 등반으로 마침내 정상을 내준다. 토왕폭의 상단쯤 오르면 영하 20~30도의 강추위와 토왕골 저승사자 소리 같은 바람소리, 총알같이 쏟아지는 얼음덩어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 얼음덩어리에 맞으면 얼굴은 간단히 찢겨 나가고 시퍼렇게 멍든다. 여기까지 오르는 동안 쓰여진 근육들은 돌덩이처럼 굳어지는 ‘펌핑’ 현상으로 숟가락도 들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오르다 고비를 만나면 50m 이상의 추락을 각오하고 매달린 자리에서 박혀 있던 아이스바일을 빼고 새로운 지점에 아이스바일을 박아 넣어야 한다. 전진하지 않고 매달려만 있으면 결국 체력이 소진돼 추락하고 만다.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고 전진해야 한다. 문제는 체력의 소진과 빙벽 기술의 한계보다 추락에 대한 공포라는 정신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왕폭은 많은 산악인이 유명을 달리한 곳이며, 그곳을 선등(先登)할 정도면 빙벽의 고수라 할 만하다. 언제나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전진이 가능하다.

 예술가는 암벽을 오르는 등반가와 비슷한 점이 많다.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 예술가들도 대부분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주목받는 젊은 화가가 화랑의 전시를 이어가며 재능을 인정받는 동안은 작품들이 좀 더 세련되고 기술적으로도 높은 완성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환호 속에는 작가들을 삼키는 무서운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가 숨어 있다. 크레바스로 작가들을 내모는 요소들을 경계해야 한다. 친하게 지내는 비평가도 생기고 자기 작품을 좋아하는 컬렉터들도 생기고 전속화랑입네, 무슨 아트 페어네 하며 그림이 팔리면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린 살진 돼지가 되고 만다. 시장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며 조금 세련된 벽지 수준의 그림을 남발하면서, 개념과 선문답 같은 예술 담론을 늘어놓으며, 선생님 호칭에 귀 멀어 화랑 주인들 주문에 맞추고, 예술가이기보다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어느 정도 유명해져서 그림이 팔리는 상황이니 자기 위안을 하며 자기 복제를 거듭하는 예술가가 될 것인지, 새로운 창조의 영역으로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술가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이 온다. 일보 전진을 위해 한 손을 떼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화가 남경민은 스스로를 고립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세계 명화들에 대한 오마주를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풀어내는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에게는 작품에 쏟아지는 시장의 찬사에 값싸게 환호하지 않는 굳은 결기가 있다. 일시적인 화려한 영화와 세속에 양심을 팔지 않는 품위와 품격이 있다. 알지도 못하고 떠드는, 깊이에 대한 강요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집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서 많은 사람의 평안과 행복을 느끼고 더 나아가 변화할 수 있다는 굳건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등반에서의 크럭스(등반 중에 마주치게 되는 아주 어려운 구간) 지점에 다다른 것을 알고 있다. 시장은 남경민의 작품이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인데 그는 크럭스 지점에서 자신을 던지려는 고민에 빠져 있다. 2009년 3월 미술시장이 꽁꽁 얼었을 때도 그의 개인전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때 작품을 구입하지 못한 많은 컬렉터가 아쉬움을 표시했다. 위대함은 강인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 또 잘 그려대는 재능에 담겨 있지 않다. 위대함은 양심이 무엇인지 알고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결연함에 있다. 남들이 그만하면 모두 좋다고 환호하는 그 순간에 그는 변화를 결심했다. 이제 그는 서구의 거장들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옛 그림과 한반도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선인들을 주목하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의 대표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강한 담금질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될 그의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서연종 하나은행 삼성역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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