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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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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철환
JTBC 편성본부장

전남 영광에서 택배가 왔는데 뜯어보니 굴비 두름 안에 기술사 명함과 함께 작은 카드가 있었다. 지역에서 소장으로 근무 중이라 가족 보기가 쉽지 않은데 평소에 아들을 잘 돌봐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통화를 했고 조만간 서울에서 밥 한번 먹자는 인사도 나눴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교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아들에게 제안을 했다. “이번 생일에 부르고 싶은 친구들 다 모아라. 아빠가 파티 열어줄게.” 그때 초대받은 아이들 중 민주, 진원, 철종, 진우, 현준, 준우, 성혁, 재은 이렇게 여덟 명이 나의 중점관리대상(?)이 됐다. 책이 나오면 덕담을 써서 선물했고 음악회에도 매번 불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회식을 했고 기말고사가 끝나면 여행을 갔다. 굴비의 주인공은 의대생인 현준이 아빠다. 2월 말에 부산으로 바다 구경 가자는 문자를 단체로 돌렸는데 이번 ‘부자유친 패키지’는 그들 중 가장 늦게 군대에 간 성혁이가 마침 제대를 앞두고 있어서 의미가 각별하다.

 지금부턴 내 아버지 이야기다. 내가 자주 곱씹는 말이 있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됐을까. 아버지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엔 단어 하나가 바뀐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됐을까. 아버지 덕분이다.”

 초등학교 때 이런 우스갯소리가 돈 적이 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걸 그렇게 적고 친구들은 웃었지만 난 그 대열에서 비켜나 있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걸 본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연출한 프로그램의 부제가 ‘아버지’였다. 처음 만든 뮤직비디오 제목도 ‘아버지’였다. 유지연이라는 가수가 직접 만들고 부른 노래 가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고 가슴에 생생하다. “거울 속으로 비쳐진 나의 모습을 보았지. 어느새 거기 서있는 사람은 아버지….”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다. 뭐 하나 해 주신 게 없다고 느꼈다. 여섯 살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과부인 고모에게 입양되었다. 아버지는 가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나타났다.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돌아가시면 눈물도 안 날 텐데 문상객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이런 고민까지 한 적이 있다. 마지막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난 건 오로지 아버지가 가여웠기 때문이다.

 세월은 위대하고 관대하다. 나를 가엾게 만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건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부터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내가 다시 미워지는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까. 그래. 내 아들에게 잘해야겠다. 아버지에게 못 받은 정을 아들에게 듬뿍 전해야겠다. 걔한테는 내가 방에 들어가는 걸 자주 보임으로써 친구들끼리의 웃음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아버지를 비로소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도무지 잘못된 거였다. 용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용서받아야 했다. 아버지가 준 게 없다고 불평했는데 아버지로부터 받은 게 엄청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게 뭘까. 아버지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탔지만 아버지 덕분에 상상력이 풍부해졌다. 든든한 아버지가 없어서 겁이 많았는데 겁쟁이 내색을 안 하려다 보니 눈치 빠른 사람이 되었다. 교실에서 배워야 할 두 개의 축이 창의와 예의인데 난 그 두 가지를 아버지 덕분에 한꺼번에 얻게 된 것이다.

 아들 친구들이랑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이런 얘기를 했다. “너희들은 내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가 될 거다. 왜냐고? 내 삶의 마지막 그림. 아들은 내 영정을 가슴에 안고 걸어간다. 그 뒤에 여덟 명이 관을 들고 따라간다. 그 안에 내가 있다. 영혼은 소리치지만 너희들은 들을 수 없다. 얘들아 미리 고맙다.” 잠시 숙연했지만 분위기는 곧 반전되었다. 죽음을 얘기하면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것. 이것도 아버지 덕분이다.

 새해엔 아버지 모임도 기획해야겠다. 이미 민주, 철종, 진우 아빠와는 인사를 나눈 사이다. 함께 기차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각자 아버지 얘기도 하고 아들 얘기도 하면 참 재밌을 것 같은데. 참고로 부자유친 패키지에서 부자유친은 ‘부드럽고 자상하고 유연하고 친절하다’의 준말이다.

주철환 JTBC 편성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