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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언에서 날아온 예순다섯 이장희의 편지 “그대 자유를 꿈꾼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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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저께 가수 이장희로부터 e-메일이 왔다. 지인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그는 캐리비언에 있다고 했다.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 배경인 바로 그곳이다. 중남미 해역의 진주 같은 섬들, 영국령 하바나와 네덜란드령 세인트 마틴, 미국령 세인트 토머스를 돌아 마이애미로 가는 길이란다. 도착하면 로스앤젤레스 집으로 가 ‘동면(冬眠)’한 뒤 늦봄께 울릉도로 돌아올 거라 했다. 지난달 한 방송사가 설 특집으로 그의 삶을 방영한 뒤 인터넷에 쏟아졌던 반응들이 생각났다. 한마디로 이거였다. “아, 부럽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 늦여름이었다. 가수 조영남과 팥빙수를 나눠 먹으며, 그 몇 주 전 미국 시에라네바다 산맥 종주 중 만난 브라운 베어 얘기를 해줬다. 조영남은 “그런 데 가면 이쁜 여자가 있냐, 술이 나오냐. 뭘 그렇게 땀 뻘뻘 흘리며 생고생을 하냐”고 이죽거렸다. 말이 그렇지 이장희는 조영남이 정색하고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 사내’다. 다른 쎄시봉 멤버들 생각도 다르지 않다. 말이 아닌 몸으로 살아온 때문이다. 상황이 어떻고 처지가 어떻든 매사 한결같기 때문이다. 비결을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얘기를 했다.

 “영화 ‘드라큘라’를 보곤 한 달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드라큘라가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서. 언젠가 나도 죽겠구나, 죽으면 아무도 날 기억해주지 않겠구나. 인생은 한 번뿐이란 사실에 전율하며 결심했어요. 난 살고 싶은 대로 살리라,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내 결정대로만 하리라. 물론 그래서 잃은 것도 있지만….”

 그가 꿈꾸는 삶의 핵심엔 자연, 그리고 여행이 있다. 북미 종주, 아마존 탐험, 세계 각지의 이름 모를 섬들까지. 누군가는 “돈 있으니 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답장 대신 건 안부전화 끝에 그 얘기를 꺼냈다. 그는 “하하, 난 통장도 없는데…” 하며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달리죠. 그러면서 생각해요. 돈 벌면 아내랑 여행도 가고 멋지게 살겠다고.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이에요. 여행 안 다녀본 사람이 갑자기 그 맛을 알 수 있나요? 아내라고 덥석 따라나설까요? 뭐든 해봐야 노하우가 쌓이고 재미도 커지지요. 저만 해도 ‘은퇴하면 책 많이 읽겠다’고 다짐했는데 공력이 약해 잘 안 돼요. 여행을 원하면 지금 떠나야지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요.”

 은퇴철이요, 졸업 시즌이다. 삶의 급격한 변화 앞에 맘 허둥대는 이 적지 않을 게다. 갈피가 잘 안 잡힌다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기보다, 열두 살 이장희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봄은 어떨까. 나의 욕망, 나의 행복, 오래전부터 꿈꿔온 것들. 당신이 몇 살이든, 지금이야말로 그 일을 시작하기 가장 좋은 때일 터이니.

이나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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