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올림픽 - 레니 리펜슈탈과 이미지의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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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올림픽이 개막됐다. 텔레비전에서는 올림픽의 옛 영광을 되새겨보는 기록물들이 방영되었고, 이제 본격적인 스포츠 중계가 시작되었다. 세계 평화의 제전을 표방하는 올림픽은 전 세계 국가가 참여하는 만큼 강력한 미디어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의 역사는 이미 6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거기에서 우리는 파시즘(나찌즘)과 영화의 기묘한 결합을 발견할 수 있다.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나찌즘의 선전극에 사용하기 위해 당시 음악계의 거장이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올림픽 찬가'를 작곡케 했을 뿐만 아니라 30년대 유명한 여성 감독이었던 레니 리펜슈탈에게 베를린 올림픽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했다. 그녀의 올림픽 다큐멘터리 2부작은 영화와 정치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1902년생인 레니 리펜슈탈은 1930년대 가장 유명했던 독일 영화감독중의 한 명이었으며, 남성 지배적인 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여성 감독이자 마들린 디트리히와 연기 경쟁을 했을 정도로 미모가 출중한 재능 있는 여배우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뛰어난 재능이 불행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1933년 히틀러는 그녀에게 뉘렘베르크에서의 나찌 전당대회를 촬영해달라고 요구했고, 그녀는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념의 승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1년 뒤 리펜슈탈은 뉘렘베르크에서의 나찌 전당대회를 다시 촬영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대표작이자 그녀를 평생 불행하게 만든 〈의지의 승리〉라는 작품이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한 마디로 편집(몽타쥬)의 영화이다. 그녀는 영화 단편 조각들(쇼트)을 리듬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했다. 예를 들어 〈의지의 승리〉에서 나찌의 상징을 보여주는 장면은 당의 지도자, 전당대회에 참석한 일반인들로 이어진다. 집단과 개인(영웅)이 나찌라는 상징을 통해 통합된다. 또 다른 장면에서 나찌 전당대회에 참가한 거대한 군중들이 롱 쇼트(원거리 장면)로 보여지고, 이어 히틀러 청년당원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교차된다. 롱 쇼트와 클로즈-업의 교차를 통해 리펜슈탈은 전체주의적인 집단에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장면들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관한 장엄한 다큐멘터리인 〈올림피아〉에서도 보여진다. 리펜슈탈은 베를린 올림픽을 촬영하기 위해 50명의 촬영기사를 고용했고, 아그파, 코닥, 페루츠 등 세 종류의 흑백 필름을 사용했으며, 경기 장면들을 촬영하는데 사십만 미터의 필름을 소비했다. 거대한 규모 못지 않게 리펜슈탈은 스포츠 제전을 사실적이면서도 웅장하게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테크닉을 개발했다.

리펜슈탈은 수중 촬영은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다이빙 장면을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 필름을 부분적으로 거꾸로 돌려 편집했다. 달리는 선수들의 비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정상 속도에서 느린 속도로 속도를 조절하기도 했고, 극단적으로 높은 곳에서의 공중 촬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장대 높이 뛰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땅을 파고 밑에서 촬영하거나 단거리 육상 선수들이 달리는 방향을 따라 트랙을 설치해 이동 촬영을 선보이기도 했다. 리펜슈탈은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에서 활용될 촬영 기법의 대부분을 이미 30년대에 완성한 셈이다.

문제는 그녀의 뛰어난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나찌의 정치 선전 혹은 히틀러를 찬미하는 정치 선전극에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리펜슈탈은 몇 번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가 결코 히틀러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강변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영화적 테크닉 자체가 이미 파시즘을 옹호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정한 영화 촬영기법에 근거한 형식은 결코 내용과 분리될 수 없다. 각각의 장면들(쇼트)은 하나의 의식이자 세계에 대한 감독의 시각을 담고 있다. 리펜슈탈은〈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가 연출을 한 극영화가 아니며 의도된 장면을 결코 촬영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사용한 혁신적인 기법은 이미 특정한 지점에서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고, 편집실에서의 장면 선별과 리듬적인 일치를 통한 몽타쥬의 효과는 결코 의도성을 불식시킬 수 없었다. 게다가 영화 자체가 정치극에 활용되었다.〈올림피아〉는 1938년 히틀러의 생일날 첫 상영되었다.

편집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리펜슈탈의 영화적 기법은 많은 부분 러시아의 영화 감독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쥬 기법과 비교될 수 있으며 나찌 시대의 리펜슈탈의 영화 인생은 스탈린 시대의 에이젠슈테인의 삶과 또한 많은 부분 닮아 있다. 비록 리펜슈탈이 에이젠슈타인과 달리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심취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녀의 영화는 영화 이미지의 인위적인 연결을 통해 집단적인 주체인 대중을 형상화하고 개인과 대중의 통일성을 긍정하는 것이었다(몽타쥬의 영화).

리펜슈탈(혹은 에이젠슈테인)의 야망은 이미지의 권능(력)을 현실화하는 것, 다시 말해 세계를 사고하고, 통제하고, 인간 개개인의 힘들을 하나의 전체로 엮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미지를 갈망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만들어낸 영화 이미지는 이미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를 느껴보고 싶은 분들은 이번 제4회 다큐멘터리 영상제에서 상영될 레니 리펜슈탈의〈의지의 승리〉를 놓치지 말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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