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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화이트삭스의 지장 매뉴엘 감독

중앙일보

입력

올시즌 메이저리그 화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카고 화이트삭스 돌풍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약체로 평가되던 화이트삭스는 올 정규시즌을 20여 게임 남겨놓고 있는 현재 82승56패로 메이저리그 전체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화이트삭스가 현재 내셔널리그 최고승률팀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81승57패)와 올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을 다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화이트삭스는 투타의 조화는 물론이고 다 진 경기를 막판에 뒤집는 등 특유의 승부기질을 가진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 단기전으로 벌어지는 월드시리즈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분석.

전문가들은 올시즌 화이트삭스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데는 팀 사령탑인 제리 매뉴엘 감독(46)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과 용병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감독들처럼 유명선수 출신은 아니다.

미해군 요리사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체로키 인디언피를 물려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매뉴엘 감독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조지아주 세실에서 태어난 매뉴엘 감독은 그의 부친이 노새를 판돈 2백26달러를 주고 산 다쓰러져가는 3베드룸 하우스에서 5명의 형제 자매와 함께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요리사로서 받는 적은 봉급을 메꾸기 위해 늘 ‘더블’을 뛰어야 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단돈 6달러를 벌기 위해 주말마다 2백파운드의 목화를 따야만 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풋볼과 야구 등에서 재능을 보였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풋볼로 UCLA 장학생으로 갈수도 있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만5천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마이너리그선수가 됐다. 그후 그는 14년간 마이너리그 선수생활을 거쳐 스카우트, 인스트럭터, 마이너리그감독을 했으며 마침내 메이저리그 감독 자리에까지 올랐다.

주위에서는 ‘포커페이스’로 상징되는 무표정과 경기중 승부처에서 강공으로 밀어붙이는 저돌성이 그의 잡초같은 인생과 무관치 않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이 꼽는 매뉴엘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은 이렇다.

첫째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승부사적 기질.

화이트삭스 론 슐러 단장은 그를 ‘배짱의 승부사’라고 평가한다. 또 폭스TV 해설자 켄 해럴슨은 “도무지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감독”이라고 말한다.

그의 승부사 기질은 두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지는 경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다 결국 승리를 거머쥔다.

화이트삭스는 올시즌 초반 연승가도를 질주하며 5월초 아메리칸리그 중부조 라이벌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3경기반차까지 떼어놨다.

그러나 화이트삭스는 이후 11게임 중 9번을 패해 인디언스에 조 공동선두를 허용했다.

인디언스에 공동선두를 허용한 직후 가졌던 미네소타 트윈스전.

9회까지 2-1로 뒤져 승부가 그대로 끝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화이트삭스는 9회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막판 뒷심을 발휘하며 단숨에 2득점, 3-2의 극적인 역전극을 만들어냈다.

올시즌 화이트삭스와 상대했던 감독들은 “이겼다 생각하면 갑자기 불같은 공격이 터져 나온다. 화이트삭스와 상대할 땐 경기가 끝나 선수들이 짐을 싸야만 마음을 놓는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선수기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배짱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지난 6월11일, 시카고 컵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

1,2차전을 승리한 화이트삭스는 한경기만 잡으면 시리즈를 싹쓸이할 수 있는 찬스.

그러나 팽팽하게 접전을 벌이던 경기종반 매뉴엘 감독은 1급 셋업맨 2명을 보따리에 감춰둔 채 2급 구원투수인 헤수스 페냐를 기용했다. 팀관계자들과 선수들 그리고 팬들은 왜 이길 수 있는 경기에 확실한 구원투수를 기용하지 않느냐는 볼멘소리들을 했다.

결국 이 경기에서 화이트삭스는 6-5, 한점차로 분패했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기용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러나 이같은 용병술은 컵스와의 3연전 이후 벌어진 인디언스와의 3연전 그리고 뉴욕 양키스와의 4연전이 끝난후 열광적인 찬사로 변했다.

매뉴엘 감독은 컵스전에서 감춰놨던 1급 셋업맨들을 총동원 인디언스와 양키스와의 7경기를 몽땅 휩쓸었다.

둘째는 치밀한 선수관리.

매뉴엘 감독은 선수들이 연습 하는 모습을 ‘가장 많이,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하루 일정 가운데 팀관계자들과 전략과 선수기용을 숙의하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선수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가까이에 가서 세밀하게 관찰한다. 주위에서는 이를 두고 선수를 “보고 읽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같은 세밀한 선수관찰이 최상의 컨디션에 있는 선수를 적기에 기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승리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 5월13일 미네소타 트윈스전.

경기가 풀리지 않아 경기 막판까지 리드 당하던 화이트삭스는 종반 뒤집을 수 있는 마지막 찬스를 잡았다.

매뉴엘 감독은 이 순간 타율 .283으로 그런대로 믿을 수 있는 타자 조시 폴을 주저 앉혔다. 핀치히터를 기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타격코치는 당연히 덕아웃에 대기하고 있던 타율 .319의 크레이그 윌슨 또는 좌타자인 마크 존슨(당시 트윈스 투수는 우완 밥 웰스) 중 한명이 타석에 나설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덕아웃에 앉아있던 타자들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살펴보던 매뉴엘 감독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던 제프 애보트를 지목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수기용이었다.

당시 애보트의 타율은 겨우 .115로 지난 26타석에 나와 단 3안타에 그치는 형편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타격코치와 다른 선수들의 불안한 시선을 뒤로 하고 타석에 나선 애보트는 인코너 낮은 쪽을 파고드는 웰스의 두번째 볼을 타이거 우즈의 티샷같은 호쾌한 스윙으로 좌월 결승홈런을 작렬시켰다.

애보트는 경기가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어제 타격연습을 지켜보던 매뉴엘 감독이 핀치 상황에서 뛰어볼 것이냐고 물어봐서 오늘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러나 처음에는 핀치상황이라고 해서 핀치히터가 아니라 핀치러너를 말하는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매뉴엘 감독은 “어제 연습중 애보트의 방망이 끝이 예전과 달리 날카롭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기록에 관계없이 확신을 갖고 기용했다”고 말했다.

세째는 인화를 중시하는 리더십.

매뉴엘 감독은 화이트삭스 팀관계자들 중에 팀의 간판타자인 프랭크 토마스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화이트삭스는 지난해 토마스에게 본업인 지명타자 대신 1루를 당분간 맡아주기를 요구했다.

지난 90년 데뷔한 후 97년까지 3할대 이상의 타율과 매년 40개 가까운 홈런을 때려온 토마스는 이같은 팀의 요구가 자신을 ‘한물 간 타자로 평가해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팀에서 떠날 것임을 시사하는 등 크게 반발했다.

매뉴엘 감독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있어 다른 팀관계자들 아무도 말을 못붙이는 토마스를 데려다 대화를 나눴다.

매뉴엘 감독은 토마스에게 “나는 네가 누구보다 뛰어난 타자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지명타자 보다 1루수로 출장해 경기를 하다보면 경기감각도 익히고 또 팀에 대한 책임감도 생긴다. 팀과 네가 함께 사는 길이다. 나를 믿으면 시키는데로 해라. 너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매뉴엘 감독과 대화 한 후 토마스는 지명타자 대신 1루수로 출장하며 그해 자신을 타율을 .305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토마스는 올시즌을 얼마 안 남겨놓고 있는 현재 타율 .333과 홈런 40개라는 빼어난 기록을 올리며 화이트삭스 돌풍의 핵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4월28일.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원정경기에서 3-2 신승을 거뒀다. 4월22일 타이거스전에서 양팀선수들이 난투극을 벌여 8게임 출장정지를 당한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밤 선수들이 힘든 경기를 끝내고 숙소인 리츠 칼튼호텔을 찾았을 때 정복을 입은 호텔 도어맨이 문을 열어줬다. 도어맨은 “리치 칼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며 선수들을 맞았다.

선수들이 “예아-, 예아-”라고 피곤한 말투로 대답하며 호텔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누군가 그 도어맨이 바로 매뉴엘 감독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감독은 물론 주전선수 다수가 빠진 상태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선수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매뉴엘 감독이 도어맨 유니폼을 입고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밤 화이트삭스는 감독과 선수를 가리지 않고 완전히 하나가 됐다.

화이트삭스의 돌풍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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