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상일의 시시각각

친노가 ‘친노’란 말을 꺼린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상일
논설위원

장 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참여)은 2012년 1월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 20세기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시민의 현실참여를 북돋기 위해 정당을 만들려 했지만 호응 부족으로 실패했다. 그가 추구했던 이상을 민주통합당(약칭 민주당)이 보란 듯이 실현해 보였다. 시민이 64만여 명(투표자 수는 51만여 명)이나 참여한 민주당 지도부 경선은 흥미진진했다. 민주당이 세계 정당사에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고 주장하는 시민의 모바일 투표는 이젠 참여정치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을 걸로 보인다. 올여름의 최대 이벤트가 될 여야의 대통령 후보 경선 때도 시민의 엄지손가락이 승패를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경선에서 ‘참여’의 과실은 친노무현계(친노) 수중(手中)으로 떨어졌다. 1위로 대표직을 차지한 한명숙 전 총리, 정치 초년병인데도 2위에 오르며 기염을 토한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재미를 본 것이다. 친노 진영의 핵심 브레인으로, 야권통합과 시민참여 경선의 기획자인 이해찬 전 총리가 의도했던 결과가 그대로 나온 것이다. ‘친노가 완전히 부활했다’고 언론이 평가하는 이유다.

 하지만 친노는 ‘친노’라는 말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한명숙 대표는 “친노, 반노(反盧), 비노(非盧)는 언론이 만든 구도이며, 분열적 레토릭”이라고 했다. “한명숙은 원래 친DJ(김대중 전 대통령)다. DJ가 불러 정치에 입문했다”는 말도 했다. 노사모의 핵이었던 문성근 최고위원도 ‘친노 부활’이란 시각에 대해 “(야권) 갈라치기 느낌이다. 그 구분은 의미가 없다”며 불쾌감을 표출했다. 자기도 DJ와 인연이 깊다고 강조하면서다. 반면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임을 자부하는 박지원 최고위원은 두 사람 앞에서 가시 있는 얘기를 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선과 이념이 계승돼야 한다는 차원에서 정치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데도 이 기준을 적용했다. 민주당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건 한 대표와 문 최고위원의 본색이 친노라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친노는 왜 친노라고 불리는 걸 꺼리는 걸까. 한편으론 당이 분열될까 봐, 다른 한편으론 국민이 노무현 시대의 과오를 떠올릴까 봐 그러는 것 아닐까. 그땐 그랬다. 친노는 ‘사람 사는 세상’을 열겠다고 했지만 실제론 사람을 이념과 계층으로 편가르고, 갈라치기했다. 보혁(保革)·빈부·여야 갈등을 빈번하게 일으켜 사는 게 피곤한 세상을 만들었다. 이명박 정권이 살기 힘든 세상을 연장하는 바람에 친노는 부활의 기회를 잡았으나 그들의 능력이 과거보다 개선됐다고 볼 근거는 아직 없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친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역량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이미지, 그들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한 대표는 그간 큰 고초를 겪었다. 이른바 ‘곽영욱 사건(뇌물 수수 혐의)’과 ‘한만호 사건(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으로 검찰에 불려가 여러 번 조사를 받았고, 두 차례 기소됐다. 그는 두 사건 모두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가슴엔 한(恨)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다. 문 최고위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전후해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백만 민란’이란 행동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정권을 잡아 당한 만큼 되돌려주겠다고 소리친다. 지금 친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증오와 복수가 아닐까 싶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고, 한 대표도 모진 수모를 당했으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증오심·복수심만으로 정권을 빼앗을 수 있을까. 2040세대의 허탈감과 분노를 자극해 반사이득을 취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DJ는 말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호남세력을 제압하고 제1야당을 접수한 친노에게 특히 필요한 건 상인적 현실감각이다. 그게 있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나 대통령 탄핵 같은 구호를 함부로 외치기 어려울 것이다. 선동적 구호는 ‘분노의 언어’일 뿐 ‘해법의 언어’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