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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원유 동맥...봉쇄 땐 이란 스스로도 치명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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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의 파고(波高)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는 보고서를 냈다. 국제사회는 이란에 대한 경제제 재를 강화했고 이란은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맞섰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엄청난 규모의 소용돌이가 시작될 것이다. 호르무즈는 지구촌 해상 수송 원유의 35%가 통과 하는 길목이다. 그게 막히면 세계 경제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미국은 “해협을 봉 쇄하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고 있다. 영국도 “봉쇄 위협이 있다면 모두 함께 행동에 나설 것으로 확신한다”고 13일 발표했다. 호르무즈 해협의 격랑이 어디로 흘러갈지 그 물살의 흐름을 들여다봤다. 

1988년 4월 14일, 미 해군의 미사일 탑재 호위함 새뮤얼 B 로버츠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운항 도중 기뢰와 충돌했다. 8년째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이었다. 페르시아만에서 쿠웨이트 유조선을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작전을 수행하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기뢰가 터지면서 새뮤얼 B 로버츠에는 직경 7m가 넘는 거대한 구멍이 났다. 배는 침몰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가까스로 침몰을 면하고 이틀 뒤인 16일 인근 두바이로 예인됐다.

사태 수습 후 미 해군 특수부대 다이버들이 사고 현장에 투입됐다. 다이버들은 사고 해역에 설치된 다른 기뢰들을 찾아냈다. 수거한 기뢰들에서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1년 전인 87년 9월, 이란의 기뢰부설함 ‘이란 아지르(Iran Ajr)’에서 압수한 기뢰와 번호 매기는 방식이 비슷하고 숫자 차이가 별로 많지 않은 일련번호들을 발견한 것이다. 미군은 주저 없이 이란에 대한 보복작전을 결정했다.

18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2차 대전 후 미군이 벌인 최대 해상 전투가 시작됐다. ‘사마귀 작전(Operation Praying Mantis)’으로 명명된 전투는 아침 8시 미 해군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미 항모 USS 엔터프라이즈에서 전투기들이 날아올랐고, 구축함 USS 메릴과 USS 린드 매코믹, 그리고 상륙수송선 USS 트렌튼과 해병 공지(空地) 기동부대가 선봉에 섰다. 이들에게 호르무즈 해협의 이란 수역에 설치된 사싼 원유채굴 플랫폼에 설치된 기관총과 군사시설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 시간도 채 안 돼 사싼 플랫폼은 박살이 났다. 이란은 무장 고속정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전투가 격해지면서 양측은 미사일 공격도 주고받았다. 미 군함 USS 심슨은 이란 기습함정 조샨에 스탠더드 미사일을 명중시켜 호르무즈 바다 속으로 가라앉혔다. 하루 동안의 전투였지만 이란은 미군의 막강한 전력을 확인하며 치명적인 피해를 봤다. 이날 전투로 이란은 소형 구축함 한 척과 포함(砲艦) 한 척, 그리고 무장 고속정 6척을 잃었다. 호위함 한 척은 심각한 손상을 당했다. 하지만 미군 피해는 거의 없었다.

전쟁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미사일 순양함 USS 빈센스에 파괴된 USS 로버츠를 예인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한 달 후 USS 빈센스가 호르무즈 해협에 도착했다. USS 빈센스의 승무원들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긴장이 사고를 불렀을까? 7월 3일 USS 빈센스 수병이 호르무즈 해협 상공을 지나던 이란 민항기를 격추시켰다. 정상적인 항로로 비행하던 이란에어 655편이 승객과 승무원 290명과 함께 호르무즈에 수장됐다. 미국 정부는 자국 해군이 이란 항공기를 F-14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해명했다. 이란 정부는 USS 빈센스가 민항기라는 걸 알고도 격추시켰다고 맞받았다.미국과 이란은 ‘1일 전쟁’을 치른 지 20년 후인 2008년 1월에도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호르무즈 해협 공해상을 운항하던 미 군함 3척에 5대의 이란 고속정이 전속력으로 돌진하다 교전 직전 200m 거리에서 갑자기 기수를 돌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유전지대 고려해 그어진 국경선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중요성은 석유에서 비롯된다.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64%가 중동에 몰려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원유의 상당 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전 세계로 수송된다. 중동은 석유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1919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으로 밀고 들어갔다. 국제연합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두 나라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새로 발견된 유전지대를 고려해 중동에 국경선을 그어나갔다. 이때부터 유전이 중동의 정치지형에서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중동지역에 새로운 이해관계자가 등장했다. 미국이다. 1930년대부터 이라크 석유회사에 대한 미국 석유업자들의 대규모 투자가 시작됐다.

중동에서 생산된 원유의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세계 각국으로 배달되면서 이 ‘바다 골짜기’는 지구촌 최대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 하루 평균 14대의 초대형 유조선이 1550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빠져나오는 지구촌 ‘원유의 동맥’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원유는 해상으로 수송되는 전체 원유의 35%에 달한다. 2011년 기준으로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를 차지한다.

지난해 말부터 이란이 이 해협을 다시 봉쇄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서방세계의 경제 제재에 호르무즈 해협을 막아 맞대응하겠다는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호리병 목 같은 지형적 특성상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란과 오만 사이에 있는 호르무즈 해협의 폭은 80㎞다. 이란 영해에 섬이 있어 가장 좁은 곳의 폭은 54㎞다. 하지만 수심 때문에 실제로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뱃길은 해협 중앙의 폭 10㎞ 정도다. 바로 이 구역을 봉쇄하면 항공모함이나 유조선 같은 큰 선박은 해협을 드나들 수가 없다.

통상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바다 위의 도로 체계’라 할 수 있는 분리통항체계(TSS, 선박의 충돌 방지를 위한 왕복 항행 분리 방식)를 따라 운항한다. 유조선과 같은 큰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해역을 둘로 나눠 한쪽은 들어가는 바닷길로, 다른 쪽은 나가는 바닷길로 사용하도록 규정해 놓은 것이다. 선박의 충돌사고를 막기 위한 조치로 해당 해역을 통과하는 모든 배들은 이 규정을 지켜야 한다. 중간에 대략 3㎞ 폭의 중앙선 역할을 하는 중앙분리구역이 설정돼 있다.문제는 이러한 통행구역이 오만 영해 서쪽에서는 이란 영해에 속해있다는 점이다. 이란이 이 수역을 봉쇄한다면 유조선이나 군함이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갈 수도, 페르시아만에서 오만만(灣) 쪽으로 나올 수도 없다.

선박 봉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해협 길목에 기뢰를 설치하거나 ▶자국 잠수함을 이 해협에서 기동하거나 ▶이란 본토에서 미사일 공격을 하는 것이다. 어느 방법을 쓰든 기간이 문제일 뿐 전쟁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미 해군 전문가들은 이란이 해협 봉쇄에 나설 경우 미군이 해협을 다시 여는 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개월까지도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이란엔 앉은 자리에서 깨끗이 죽는 옥쇄(玉碎)나 마찬가지다. 산유량이 세계 4위인 이란은 전체 수출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70%나 된다.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 자국의 원유 수출 길도 막힌다. 오랜 경제 제재로 가뜩이나 어려운 이란 경제는 한층 고통이 더 심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이 세계 최강 미군과의 전쟁까지 감수하면서 해협 봉쇄를 실행에 옮길지는 미지수다. 미 제5함대가 호르무즈 해협 인근 바레인에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이란이 섣불리 미국을 자극하는 군사 도발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제 5함대에는 항공모함 1척 등 전투함정 15척, 함재기 100여 대로 구성된 항모 전투단과 해병 2개 여단이 있다. 제5함대 전력은 이란 해군 전체 전력을 합친 것보다 최소 2~3배는 우위에 있다는 게 미국 안보 싱크탱크 스트랫퍼(Stratfor)의 분석이다.
미국은 현재 제5함대 소속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를 아라비아해에 배치한 데 이어 최근 또 다른 항공모함 칼 빈슨을 호르무즈 해협 주변 해역으로 파견했다.

박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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