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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강수량 측정 게을리 한 관원 … 곤장 100대 때린 정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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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이하상 지음, 소와당
312쪽, 1만5000원

추석연휴였던 2010년 9월 21일 서울에는 하루에 259.5㎜의 엄청난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1908년 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서울의 9월 하순 강수량으로는 최고치였다.

기상청 예보관들도 폭우를 충분히 예상했고, 9월 하순 상황으로는 넉넉한 ‘80㎜의 강수량’을 예보했지만 결국 빗나갔다는 지적을 받았다. 예보관들은 “관측 사례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상황까지 예상해서 예보를 내느냐. 기후변화 탓이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1847년 9월 10~11일 서울에 423㎜의 비가 쏟아졌고, 한겨울인 1828년 1월에도 한 달간 547㎜의 강수량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상식을 뛰어넘는 폭우·폭설이 쏟아진 적이 과거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측우기. 세종대왕 때인 1441년 세계 최초로 발명됐다. 측우기의 역사를 연구하고 세계에 널리 알린 이는 일본인 학자였다.

 우리 민족이 수백 년 전의 강수량 자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조선 세종대왕 때인 1441년 세계 최초로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했고, 세종·영조·정조 때 측우제도를 체계적으로 갖추고 강수량을 측정한 덕분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지낸 이하상 박사는 이 책에서 측우기를 발명·이용하게 된 조선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측우기의 구조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 초대 관측소장을 지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의 연구 논문 등을 많이 참고했다. 와다 유지는 조선시대 측정한 강수량 자료를 현대식으로 정리했고, 측우기에 대한 기록을 프랑스어와 영어로 발표해 조선의 측우기가 세계 최초의 것임을 알렸다.

 이 책은 특히 당시 세자이던 세종의 아들 문종이 측우기 발명 아이디어를 냈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물론 뛰어난 발명가인 장영실이 간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산 장씨 족보 외에는 장영실이 발명했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요즘도 같은 서울 안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곳과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곳이 엇갈릴 때 예보가 틀렸다는 논란이 벌어지는데,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786년 정조는 “같은 지척의 거리에 있는 경기 지역 안에서 어찌하여 양이 많고 적은 차이가 있단 말인가”하고 직접 야단을 내리기도 했다. 강수량 기록에 태만했던 관원은 형조로 불려가 곤장 100대의 심한 처벌을 받았을 정도로 정조는 강수량 측정에 관심이 깊었다. 옛 조상들과 오늘의 우리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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