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달라졌다] 上. 그룹보다 기업이다

중앙일보

입력

재벌이 달라지고 있다. 그룹간 공동체 의식과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계열사가 홀로서기에 바쁘다.

그룹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자 덩치 불리기를 포기한 채 내실을 다지는데 힘쓰고 있다. 안팎으로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맞춰 변신하는 재벌의 모습을 시리즈로 집중 조명한다.

"남보다도 못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룹이라는 공동체가 사실상 없어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7월 캐나다 CIBC은행에서 빌린 자금에 대한 지급보증 문제가 불거져 현대중공업과 현대전자가 소송으로까지 치달았다.

돈을 값싸게 빌릴 수 있는 계열사가 목돈을 빌려 사정이 좋지 않은 계열사를 지원해온 것은 그룹 구조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한국뿐 아니라 그룹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외국 기업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자금 웅덩이(pool)' 기능을 그룹 체제의 강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도 그룹 체제가 약화됐다는 또다른 방증이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계열사들이 한결같이 등을 돌려 황당했다" 고 말했다.

현대건설이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하자 계열사들은 "이사회와 주총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협조할 수 없다" 고 답변했다.

현대상선과 현대종합상사 등 두회사만 현대건설을 도왔다. 지난달 29일 만기가 돌아온 1천4백여억원의 진성어음을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상선에서 긴급자금을 빌려 막았다.

이처럼 이제 서로 혼자 살기 바쁘다. 그룹 시대에서 기업 시대로 변화했다. 지난해 대우그룹이 넘어갈 때만 해도 재계는 '그룹 구조의 위기' 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시장의 힘' 이 교훈이었다.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는 "정부와 시장의 힘이 역전돼 정부가 구제금융 등 예전과 같은 지원방식을 택하더라도 시장이 수용하지 않으면 3대 재벌도 쓰러질 수 있다는 게 대우의 교훈이었다면 현대의 유동성 위기는 '그룹 구조의 해체' 라는 신호를 재계에 주었다" 고 말했다.

산업자원부 이재훈 산업정책국장도 "재벌이 이제는 다른 계열사를 도와주더라도 그 기업이 잘못되면 우리만 손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며 "그 결과 그룹 중심에서 기업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다" 고 진단했다.

계열사간 자금이전이 안되는 상황에서 경영실적이 좋지 않은 일부 계열사가 자금난을 겪을 경우 그룹의 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

LG그룹 임원은 "계열사 중 3분의 1이 수익과 성장성 등이 취약해 앞으로 돌보지 않을 방침" 이라며 "이들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해야 그룹 전체의 위기로 연결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재벌의 변화는 경영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98년부터 5대 그룹을 중심으로 이뤄진 부당내부거래 조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계좌추적권을 동원했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내부거래 차단을 '재벌개혁 플러스 3원칙' 의 하나로 발표했다. 사외이사 선임 의무화.소액주주의 감시기능 강화 등 지배구조의 개선도 영향을 미쳤다.

재벌 오너와 전문경영인간 역학관계가 바뀔 가능성도 거론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기관투자자나 소액주주와의 연대 등 전문경영인이 하기에 따라서는 오너의 지배권을 약화시킬 통로가 넓어졌다" 고 말했다.

재벌 오너들은 요즘 애써 경영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관계자는 "재벌 오너라도 지분만큼만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게 정몽헌 현대아산 의장의 뜻" 이라며 "그 결과 그룹이 구심점을 잃고 헤맨다는 이미지를 주고 있다" 고 말했다.

LG그룹 관계자도 "구본무 회장은 자신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LG전자와 LG화학의 의사결정에만 참여할 뿐 나머지는 보고조차 받기를 꺼려한다" 고 말했다.

그룹 회장의 경영권 행사를 뒷받침해 온 그룹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정부의 압박은 이같은 흐름을 가속화할 것이다. 오너회장이 그룹 일에 관계하지 않으면 그룹 구조의 해체는 시간 문제다.

그룹 구조가 해체되는 데 대한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산업연구원 김용열 연구위원은 "한국 경제을 먹여살릴 수종(樹種)산업을 육성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이는 각 계열사의 갹출로 조달해야 하는데 그룹 구조가 붕괴되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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