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unday]법률시장 이전투구 관전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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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호 31면

김모(34) 변호사는 최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사법연수원 동기생 A씨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요즘 어디서 일하느냐”고 물었다가 멋쩍은 일을 당했다. A씨 앞에 서 있던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빨리 가자”고 재촉했던 것이다. 동기는 ‘○○○ 변호사 사무실’이라고 적힌 명함을 한 장 건네고는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뒤 A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실은 그 머리가 하얀 분이…”라며 털어놓은 그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내성적이던 A씨는 연수원 졸업 후 취업에 실패했다. 상실감에 빠져 있던 그에게 “개업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서초동 법조타운에 사무실을 열 테니 동업해 보자는 것이었다. 단꿈도 잠시, 사무실 개소 직후 그는 자신이 “사무장의 변호사”란 것을 알게 됐다. 사건을 끌어오는 유능한 사무장이 A씨의 월급을 주는 ‘고용주’였다. 현행 변호사법에는 사무장이 변호사를 고용해 법률 서비스를 하는 게 불법이다. 하지만 변호사 공급과잉시대를 맞아 서초동에는 이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고용된 사무장 변호사들이 꽤 늘어났다고 한다.

다음 달이면 2500여 명의 법조인이 새로 법률시장에 진입한다.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시험을 통과한 1500여 명과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는 1000여 명이 그들이다. 이들 중 검찰과 법원, 대형 로펌에 취직할 수 있는 인원은 500명 남짓. 2000여 명의 새내기 법조인은 법률상담 경험이 전혀 없지만 당장 개업을 하거나 뭔가 수를 찾아야만 한다. 서초동의 노련하고 유능한 사무장들이 이들의 시장 진입을 반색하고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변호사 공급과잉시대를 맞아 수임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게 뻔하다. 통상 형사사건 하나당 변호사들이 받는 수임료는 500만원 내외다. 하지만 2000여 명의 변호사가 한꺼번에 개업시장에 뛰어들면 단가가 곤두박질치리라는 건 불문가지다. 변호사들로선 이래저래 죽을 맛일 것이다.

로펌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한·미,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법률시장이 개방돼 외국의 유명 로펌들이 대거 한국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폴 해스팅스, 클리얼리 고틀립, 셰파드 뮬린, 심슨 대처 등 최근 서울 사무소 개설을 밝힌 미국계 대형 로펌만도 네 곳이나 된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가 “외국 로펌들이 국내 어떤 로펌과 손잡을지가 올해 법률시장 생존 경쟁의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해외 로펌의 국내 시장 진출은 경쟁의 격화뿐 아니라 국내 중소 로펌들이 흡수합병된다는 걸 의미한다. 만일 시장 경쟁력을 잃은 중소형 로펌들이 퇴출된다면 신출내기 법조인들이 애써 잡은 일자리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다음 달 졸업하는 제1기 로스쿨생들의 변호사시험이 지난 7일 끝났다. 어쩌면 올해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첫해가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변호사만 되면 평생 먹고 산다’는 이야기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의뢰인들에게 고압적이고 불친절한 변호사들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기업도 그렇고 언론도 마찬가지지만 공급자가 주인이던 세상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제는 변호사업계도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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