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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혈구 단백질 30세트가 혈액형 결정... ABO·Rh(-) 가장 중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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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초겨울 오후, 서울의 모 중학교. 1학년 교실에 갑자기 양호 선생과 서울시교육청 학교보건진흥원에서 파견 나온 선생이 흰 가운을 입고 들어왔다. 예방주사철도 아닌데…의아해 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혈액검사를 했다. 혈액형 다 알고 있는데 또 무슨 검사? 학생들은 투덜거리며 유리조각으로 귀에서 피를 뽑혔고 교실은 어수선해졌다. 모두 검사를 마쳤을 때 선생이 한 학생을 불러 재검을 했다. 그 학생이 세 번째 불려나가자 교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학생은 죽을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고 급우들은 모두 의구심으로 주시했다. 양호실까지 불려가 다섯 번의 검사를 마친 후 그 학생에게 양호 선생님은 “아주 희귀한 Rh(-) 혈액형을 가졌구나. 앞으로 사고 당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검사한 전교생 2500명 중 오직 2명만 Rh(-)였다. 아무튼 혈액형이라곤 ABO형밖에 모르던 1학년 그 학생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가족 중에 아무도 Rh(-)가 없었다. 그날 사건은 학생에게 인간 생리현상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의문을 심어줬고 전혀 관심이 없던 생명과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학생이 바로 필자다.

우리나라에서는 ‘B형 남자친구’처럼 특정 혈액형이 영화제목이 되기도 하고 성격에 큰 영향을 주는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막상 A, B, AB나 O, 혹은 Rh(+)나 Rh(-)가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보면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들을 비롯해 혈액형은 핏속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 세포의 표면 세포막에 존재하는 단백질이나 단백질에 붙어 있는 탄수화물 조각들을 의미한다. 과학적으로는 성격과 혈액형의 관련성이 밝혀진 바 없다.

사람의 적혈구에는 혈액형을 결정하는 약 30세트의 단백질군이 있다고 국제수혈협회(ISBT)는 공식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ABO, Rh 등은 그 세트 중 하나다. 나머지 28세트가 더 있다. A형은 적혈구 세포막 단백질에 A 특유의 탄수화물 조각이, B형은 B 특유의 조각이, 그리고 O형은 이런 탄수화물 조각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Rh(+)는 D라는 단백질이 적혈구 세포막에 있는 경우이고, (-)는 없는 경우다. ABO 형은 전인류에게 보편적이나 Rh형의 경우 서양인에겐 15%, 아시아인에겐 0.3% 정도다. 또 혈액형의 세트마다 여러 종류의 단백질이 존재할 수 있어 혈액형과 관련해 약 600 종류의 다른 단백질이 인류에게 있다고 하나, 대부분은 매우 희귀하고 또 어떤 혈액형 그룹은 특정 종족에서만 발견되기도 한다. 이들 혈액형 관련 단백질들은 인체 내에 항체를 형성하는 원인인 항원이 되므로 혈액형이 맞지 않으면 수혈 때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나 위험할 수 있다.

수혈 때 가장 중요한 ABO 혈액형과 Rh 혈액형은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 생리학자 카를 란드스타이너가 발견했다. 1901년 ABO 혈액형을 발견한 그는 같은 혈액형은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아 피가 엉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발표했다. 그의 연구를 기초로 1907년 미국 뉴욕의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 세계 최초의 수혈이 실시됐다. 이 공로로 그는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연구비 부족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1937년 Rh 혈액형을 규명했다. 그는 C 베다디티, A 포퍼와 함께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최초로 발견하기도 한 인류에의 공헌이 지대한 훌륭한 과학자였다.

혈액형을 결정하는 단백질들의 유전자는 인체의 다른 유전자들과 마찬가지로 부모 각각으로부터 하나씩 받는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양쪽 부모로부터 받은 혈액형 유전자가 다른 경우다. 예컨대 엄마로부터는 A형을, 아빠로부터 B형을 받는 식이다. 이렇게 태아가 어머니와는 다른, 부계로부터 온 혈액형 유전자를 갖게 되면 모체에 없는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모체는 이들 태아 단백질을 자신의 유전정보에는 없는 외부물질로 인식해 항체를 만든다.

ABO 혈액형인 경우는 모체와 다른 태아의 혈액형에 대해 항체가 만들어져도 ‘크기가 너무 큰 항체 종류’라 태반막을 통과하지 못해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모계가 Rh(-)이고 태아가 Rh(+) 유전자를 갖게 되면 모체는 Rh 유전자에서 만들어진 태아의 D라는 단백질에 대해 항체를 만들게 된다. 이는 ‘크기가 작은 종류’의 항체라 쉽게 태반막을 통과하고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켜 태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미리 혈액형을 알고 있으면 임신 후 Rh 유전자의 단백질 D항체에 대한 항체를 투여해 D항체 형성을 억제하면 태아를 보호할 수 있다. 미리 안다는 것이 때로 불행을 예방하는 유용한 통로가 될 수 있는데 Rh 혈액형의 경우가 그 좋은 예다. 아이들, 특히 여자 아이의 경우 가족에 Rh(-) 혈액형이 없어도 미리 한번쯤 Rh 혈액형을 확인해 두는 것이 미래에 대한 좋은 대비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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