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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외국인, 한국 닭갈비집서 '봉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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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한 식당에서. 한식은 알록달록 색이 곱고 모양도 예뻐서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먹기 위해 한국어 공부 … 비빔밥은 ‘축복’

한국의 대표 음식이 불고기·삼겹살·갈비라고? 천만에! 나 같은 영국의 채식주의자도 한국에서 신명나게 살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만의 생존법을 터득하기까지 나는 배움과 발견,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 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꿈만 같았다. 새로 만난 한국인 동료는 내가 채식주의자인 걸 알고 세심하게 신경을 써줬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있는 식당에 나를 데려가 줬다. 매 끼니 알록달록 예쁘게 차려진 밑반찬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늘 좋은 건 아니었다. 시련은 강원도 춘천에서 닥쳐 왔다. 춘천은 닭갈비로 유명해서 골목마다 구수한 닭갈비 냄새가 풍겨 왔다. 식당에 들어선 나는 종업원 아주머니에게 손짓 발짓을 동원해 영어로 당부했다.

 “전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고기, 노!”

 종업원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찰나, 우리 자리로 산더미 같은 닭갈비가 배달됐다. 넉넉하게 미소 짓는 아주머니를 그릇째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친구들이 닭갈비를 맛나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젓가락을 빨 수밖에 없었다.

감자, 연근 등의 튀각과 과일칩이 나오는 사찰음식점의 주전부리.

 수차례의 똑같은 시행착오 끝에 나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용 어구부터 외웠다. “고기 안 먹어요” “해물 빼고 주세요” “고기 없는 걸로 주세요” 등등.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글 메뉴판을 읽고 한국어로 주문을 하는 경지가 됐다.

 이후 나는 한국 음식의 신세계를 만끽했다. 이때 만난 비빔밥은 지금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 됐다. 이토록 단순하고 획기적이면서 아름답고도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전주와 다른 지역의 비빔밥 맛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김밥·김치찌개·도토리묵은 든든하게 허기를 채워줬다. 춘천에서 닭갈비 대신 찾아낸 막국수는 여름 별미로 그만이었다.

런던서 블로그 ‘김치소울’로 한국 채식 소개

1년간의 짧은 한국 생활을 마치고 나는 런던에 돌아왔다. 한국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블로그 ‘김치소울(kimchisoul.wordpress.com)’을 열었다. 이 블로그에서 나는 채식 중심의 한식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블로그 방문자가 점점 늘어나더니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댓글을 남기고는 했다.

 지난해 나는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월드 와이드 코리아 블로거스(WKB)’에 선정됐다. WKB는 블로그와 SNS를 통해 한국 문화와 일상을 홍보하는 글로벌 기자단이다. 한국 정부는 지난 10월 전 세계 기자단을 초청해 한국을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나도 초청돼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우리의 임무는 전국 방방곡곡에 숨은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이참에 한국의 채식을 더 파고들기로 했다. 사찰음식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찰음식은 불교 승려의 음식이다. 평범한 일상식이 전부일까 봐 은근히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서울의 한 사찰음식 전문점에 간 나는 다채로운 채식의 향연에 감격했다. 두부와 버섯요리, 콩국, 4년근 인삼이 차례로 나와 내 오감을 가득 채워줬다. 이 한 끼를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불교에서 식사 행위는 일종의 의식처럼 진지했다. 그래서일까. 사찰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니었다. 불교만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엄격한 채식 문화에 녹아 있었다. 수 세기 전의 고대 기술과 의식을 고스란히 음미하는 기분이 들 만큼 사찰음식은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오늘도 런던에서 한국 음식을 요리하고 있다. 그리고 한식을 사랑하는 채식주의자 동지가 점점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도 가끔은 한국의 채식을 즐겨 보시라 권한다. 누가 알겠나? 첫술을 뜬 순간 당신의 식성을 뒤바꿀 신세계에 새삼 눈뜨게 될지 말이다.

정리=나원정 기자
중앙일보·한국방문의해위원회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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